오늘 오후 6시, 식구들에게는 "잠시 산책 좀 하고 올게요."라고 둘러댄 다음 집을 나섰습니다. 원래같으면 오후 5시 30분까지 종묘공원으로 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식구들 눈치를 보다 보니 - 그리고 어머니가 오전 12시에 제로 걷지 못하는 외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공원을 한바퀴 돌아야 한다고 고집한 나머지 세 시간을 소비하느라 힘이 축 빠져서 - 늦게 갈 수밖에 없었죠.
처음에는 종묘공원 쪽으로 갈까 생각했으나, 어차피 모이는 곳이 광화문이고 다섯시 반에서 30분이 넘은 시간에 가면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것이 분명해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탄 뒤 광화문에 도착했죠.
그런데 그곳에 가 보니 - 그 때가 여섯 시 56분이었는데 - 아무도 없지 않겠어요? '어, 이상하다? 분명히 이곳에서 모인다고 했는데 왜 아무도 없지?'라고 생각하면서 어리둥절해 했죠.
그러다가 갑자기 '가만, 종묘공원에서 출발해 광화문으로 온다고 했으니, 어쩌면 지금 행렬이 광화문 쪽으로 오고 있는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종로 3가로 가는 길로 걸어갔죠.
다행히 제 생각은 틀리지 않았고, 저는 깃발과 휘장, 팻말을 앞세우고 "파병 철회!"라고 외치는 시위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눈치를 보다가 시위대 속으로 들어갔죠.
미니 님이 어디 계신지를 몰라 한참 찾고 있었는데(물론 그러면서도 구호를 외치는 일이랑, 오른팔을 위로 쳐들었다가 내리는 일은 계속했죠), 갑자기 누가 제 옆에서 저를 부드러군요. 왼쪽을 돌아보니 미니 님이 팻말을 들고 계시는 것이었어요(그때 얼마나 반갑던지, 눈물이 날 뻔 했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평화 연대의 회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팔운동'을 하고 고개를 쳐든 채 정면을 노려보며 '행진'을 한 다음에 교보문고 앞에 와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어요(제가 눈대중으로 보니 못해도 3천명이요, 많으면 4천명은 되겠더라고요). 곧 멈춰 선 뒤 구호를 외치면서 자리에 앉으려고 했죠.
그런데 갑자기 제 앞줄에서 고함이 터져나오고 시위대와 전경 사이에 험악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지 뭡니까? 전경들이 방패와 몽둥이를 들고 시위대를 몸으로 밀쳐내었고 어떤 전경은 정면을 노려보면서 방패를 위로 치켜들더라고요. 욕설이 터져나왔고 곧 시위하던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려들어 두꺼운 '인간장벽'을 만들었죠.
저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 그쪽으로 가서 될 수 있으면 전경들에게 가깝게 다가가 그들이 시위 행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는 그자들이 제 머리에 물푸레나무 몽둥이를 내려치거나, 군화로 마구 짓밟거나, 방패 모서리로 제 몸을 찍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어디 그렇게 할 테면 해봐. 그런다고 내가 시위를 안할 줄 알아?'라고 각오하고 이를 악물었죠(3월 20일에도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가장 나쁜 일이 벌어진다 해도 비겁하게 달아나진 않을 거라고 여기고 그들과 대치했습니다.
"폭력 경찰 물러가라!", '우리의 집회는 정당하다!", "파병 철회, 노무현 퇴진!"이라는 구호를 따라 외치며 목이 쉴 때까지 악을 썼죠. 물론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들에이 두려워서 움츠러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 어디 해봐! 밟을 테면 밟아보라고!'라고 생각하며 더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삿대질을 하고,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노무현 퇴진'이라고 적힌 종이를 치켜들었어요.
그 땐 시간이 영원히 얼어붙는 기분이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위대를 노려보던 전경들이 더 이상은 들어오지 않고 그냥 '인간 장벽'을 치더라고요. 긴장이 풀린 저는 '이제 시위 대열로 돌아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평화연대의 회원 여러분이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시위에 열중하고 인간장벽을 쌓는 벽돌이 되었을 때, 그만 헤어져 버렸나 봅니다. 저는 구호를 외치고 '오른팔 운동'을 하고 전경을 노려보면서도 주위를 둘러보며 미니 님을 찾았어요. 몇 번 그랬는데도 미니 님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그냥 민주노동당의 깃발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좀 아쉬웠죠).
그러는 도중에 시위 행렬 앞에서 경관이 확성기로 "이 집회는 불법집회입니다. 지금 당장 해산해 주십시오. 안 그러면 집회시위법 위반 혐의로 처벌하겠습니다."라고 외치길래, 저는 "법? 흥, 미국 법으로 처벌하나?"라고 빈정거린 뒤 그 경관이 뭐라고 하건 상관하지 않고 등을 보인 채 뒤돌아 앉았어요(다른 분들도 "법? 웃기네. 이게 불법이야?"라고 투덜거리고 야유를 보냈답니다). 그 다음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고 '오른팔 운동'을 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신나게(?)' 보냈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다함께'의 회원이신 '모퉁이(보안문제 때문에 본명을 밝히지 않고 그분의 회원명[: ID]을 씀)'님이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이곳에서 그분을 만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은지라 놀라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이라고 말하고 그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분이 제게 이번에는 제 여자친구가 안 왔느냐고 물어보시길래 사실대로 안 왔다고 대답했죠. 그리고 '다함께'가 펴내는 신문의 논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해서, "80%는 동의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제게 '그렇다면 우리들과 함께 일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셨지만, 아직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들어 사양했죠.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시 촛불이 나누어져서 저도 촛불을 켤 수가 있었어요. '야, 오늘은 초가 모자라서 촛불을 못 들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구나!'라고 생각한 뒤 라이터로 불을 켰죠.
그 뒤 세 분의 연설을 듣고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되뇌이며 '촛불 잔치'를 벌인 저는, 시계를 보고 '이제는 가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아홉 시에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습니다(마침 그 때 다른 분들도 일어서고 있었죠).
저를 감시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하철 역으로 내려간 뒤 지친 몸과 뿌듯한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죠.
...이번 시위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사실은, 시위대가 광화문에 온 다음에는 전경들이 인간장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설령 시민들이 파병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시위에 끼여들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경들이 시위 행렬을 세 방향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이 폭풍(반전시위)을 가둬 버리려는 '찻잔'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촛불을 들고 '오른팔 운동'을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이래서는 안 돼,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단순히 구호만 외치는 것으로는 관심을 끌 수 없어.'라고 생각하고 안타까워했죠.
뭔가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 대안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네티즌들은 정녕 게시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게시판 안에서만 크게 떠들면 뭐합니까? 밖에 나가서도 말하고 행동해야죠!).
▩조약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