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앞선 발제에서) 팔레스타인의 무장저항의 지형도나 경향성, 구체적인 사건 등 대해 이야기했다면 저는 지극히 한 개인의 차원에서 그 개인을 둘러싼 여러 맥락과 사고의 수순으로 팔레스타인에 무장저항한다는 의미를 접근해보고자한다. 이는 연대자의 태도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장투쟁을 낭만화하거나 감상에 기대어 지지를 선언하고자 함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다만, 이 과정은 나 스스로, 아시아 여성 연대자 개인으로서 팔레스타인 연대나 무장저항에 대해 보다 입체적으로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다. 시게노부가 활동을 한 주요 배경인  1970~80년대가 아닌 50여 년이 지난 지금, 10월 7일이 일어난 지 8개월이 된 오늘(6월 7일) 우리가 이 투쟁가의 회고를 어떻게 적용해야할 지 화두를 던져보고자 한다.

90년대 일본 파출소 게시판에는 시게노부의 지명수배하는 사진이 흔히 걸려있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 정부를 전복시키려 무장투쟁한 일본 적군파 리더였다.

2022년 5월 28일, 시게노부는 2000년 오사카에서 체포된 이후, 76세의 나이로, 20년만에 출소를 하게된다. 그는 1974년 네덜란드의 프랑스대사관 점거사건 혐의로 국제적인 지명수배자가 되었고, 헤이그 작전 참여를 부인했으나 20년 징역형을 받아 복역을 마친 것이었다. 당일 사진 속 시게노부 옆에 있는 젊은 여성이 메이Mei라는 딸이다. 메이는 일본어로 ‘생명’이라는 뜻이자, 영어로 5월May을 뜻하고, 그 5월은 바로 1972년 5월 31일 적군파가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 작전을 수행한 날이다.

도대체 왜 이 일본 여성은 왜 먼 팔레스타인까지 가서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 PFLP과 연대해서 비행기 납치사건과 연료탱크 폭파 작전 등을 수행하고 딸 아이 이름에까지 이 작전의 의미부여를 했을까? 이것에 대한 답을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알아보자.

#1 일본 적군파(JRA, Japanese Red Army)

  • 아랍에서는 ‘영웅’, 일본과 서구에서는 ‘테러리스트’
  • 1971년 2월 시게노부 후사코, 오쿠히라 츠요시, 야스다야 스유키, 오카모토 코조가 설립
  • 1970년대~1980년대 가장 활발히 활동.
  • 주로 레바논에서 PFLP와 협력해 리비아, 시리아 및 북한의 자금 지원으로 활동.
  • ‘국제근거지론’ 실천의 일환으로 결성된 일본의 극좌 게릴라조직.
  • 전세계 공산주의자 동맹 ‘분트’ 의 일원으로 가장 공격적인 형태의 계급투쟁을 벌임.
  • 팔레스타인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건, 팔레스타인 투쟁에 대해 일본 좌파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대의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강화하는 역할 수행

적군파에 대한 미국 학자들의  분석들.

  •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적군파』 1991년에 일본어로 초판,  2003년에 다시 찍음. 영어판은 없음. 일본의 급진좌파운동, 진보운동이 미국이랑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연구자적 관점 위주
  • 시게노부의 적군파가 속한 일본내 연합적군의 “연합적군 숙청사건 1971년 12월~1972년 2월 – 연합적군 숙청사건”을 ‘수직적 위계질서가 강한 동양 사회에서 두 조직이 통합한다는 것’으로 풀이함.
  • 윌리엄 R. 파렐 『Blood and Rage』- 미국 정부 기관 군사 컨설턴트인 자로 부시의 대테러 대책반 담당자였음.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테러리스트 라고 일컬음.
  • 퍼트리샤의 책의 국문 버젼 출간 때 <경향신문> 기사 – “PFLP는 세계혁명에 별관심이 없었다”?
    -> 1927년 브뤼셀에서 열린 첫번쨰 반제국주의연맹회의에서 비롯된 아랍연맹 흐름에 대한 몰이해라고 보임.

    • 북아프리카중동 지역이 문화적 교류가 있던 것에 비해 정치적 단결 못하긴 했으나 아라비아 반도1916~1932, 이집트1918~1918, 이라크1920~1922, 시리아와 레바논1925-26, 팔레스타인 1936-37 등 각지에서 오스만제국과 다른 열강에 맞섰고 시리아가 특히 국제연맹의 프랑스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하는 투쟁 중심이 되었었음.
    • 1944년 10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대표 만나서 연대회의를 열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구조 만드려는 시도가 있었음.
    • 1945년 아랍연맹, 시리아/레바논에 버티고 있는 프랑스 규탄 등리비아 독립투쟁, 네덜란드-영국 맞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팔 영토회복 운동 지지 흐름을 간과해서는 안됨.

주요 작전

1970년 3월 –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또는 ‘요도호 하이재킹 사건’

  • 적군파 요원 9명이 1970년 3월 31일 도쿄 하네다 공항을 이륙해 후쿠오카로 가던 일본항공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으로 넘어간 사건.
  • 적군파는 후쿠오카공항과 김포공항에서 승객 등을 모두 풀어줌. 야마무라 신지로 – 당시 운수성(국토부 같은) 정무차관을 인질로 태웠음. 같은 해 4월 3일 북한에 착륙해 눌러살았음. 적군파는 70-80년대 리비아, 시리아, 북한 지원자금 받았다는 주장이 있음.

1972년 5월 –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당시 로드Lod 공항) 습격사건

  • 이스라엘은 로드 공항 학살이라고 부름 Lod Airport massacre. 일본 적군 3명 기관총과 수류탄.  로드에 있는 이스라엘 국제공항(현 벤 구리온 공항)을 공격함
  • 로마에서 에어프랑스 비행기를 타고 도착. 바이올린 케이스에 기관총과 수류탄 넣어서. 일본인 공격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던 보안 인력. 결과적으로 26명 살해. 80명 부상
  • 이스라엘 감옥에 있는 315명의 팔 수감자 석방 요구. 이스라엘 석방 합의 했으나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승무원으로 분해 승객안전 무시한 채 돌입, 총격전, 사상자 늘어남.  서로의 총에, 수류탄에, 오카모토는 부상 후 생포 당함.
  • 의의
    • 국제적인 주목도가 올라가며 아랍사회 전면에 팔레스타인 이슈의 등장
    • 좌익과 민족주의운동 사이 국제적 연대
    • 새로운 저항 전술
    • 공항 내 보안조치가 강화되기도
    • 그러나 무엇보다 아랍인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주며 1967년 3차 중동전쟁 패배 이후 해방 열망 최고조에 달함.

이후

  • 1973년 7월 – 네델란드 상공에서 JAL(일본항공) 항공기 납치 및 폭파
  • 1974년 1월 – 싱가포르 연료 저장시설 폭파
  • 1974년 2월 – 주 쿠웨이트 일본대사관 점거
  • 1974년 9월 – 네델란드 헤이그 소재 프랑스 대사관 포위
  • 1975년 8월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미국 영사관 점거
  • 1977년 9월 – 인도 상공에서 JAL 항공기 납치
  • 1986년 5월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소재 미국, 캐나다, 일본 대사관 총격
  • 1987년 6월 – 이탈리아 로마 소재 미국, 영국 대사관 총격
  • 1988년 4월 – 이탈리아 나폴리 소재 미군 시설 공격
    -> 이후 더 이상 대규모 공격을 하지 않았고 일본에서는 사라졌음.
  • 1980년 후반 정책 변경 – 모든 군사작전 중단 (풀뿌리 지원과 민중 연대 주력)
  • 2000년 시게노부 오사카에서 체포, 2001년 4월 감옥에서 적군파 해체 선언

#2 국제주의자, 시게노부 후사코

1945년 9월 28일 도쿄 출생

전후 시대 대혼란기, 가난한 식료품집 딸, 민족운동가 출신 지식인 아버지

동네 한국인 부락에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목격, 새롭게 느낀 ‘공포’ (한국아이가 자기를 때리지 않고 그냥 물끄러미 바라봤는데. 한국인 아이의 증오가 온몸으로 느껴지면서 가장 강렬한 겁을 느낀 경험.)

고등학교 졸업 후 ‘기코망 간장회사’ 취직, 성차별 경험

메이지 대학 야간부 입학, 학생운동의 시작  – 등록금 인상반대, 하네다 투쟁, 베트남 전쟁 반대, 일본 정부의 미군 주둔 계획 반대

제1차(10.8) 하네다투쟁. 2차(11월 12일)

사토 에이사쿠 -아베 신조 외종조부- 수상의 남베트남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공항에서 투쟁을 벌임. 사토 에이사쿠는 전후 일본에서 최장기간 총리 지낸 인물로 1964~1972. 4번 총재 역임했다.

일본은 패전 후 미국에 강하게 종속되는 흐름에서 반전운동이 일었다. 50년대에는 공산당, 재일조선인 활동가 군수공장, 군용물자 운반 철도 타격 등 광범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67년 하네다 투쟁은 1960년 서명된 일본과 미국 간의 안보 조약에 대한 반대로 , 신좌익 학생운동으로 터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주권을 되찾은 이후에도 미국 군사 기지의 계속된 존재를 허용하는데 문제제기를 했다. 하네다 투쟁은 특히 미국 군대가 도쿄의 하네다 공항을 부대 및 장비의 이동지로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이는 미국과의 안보 동맹과 관련된 일반적인 반미 감정과 일본의 미국과의 안보 동맹에 대한 저항을 상징화한다.

그는 기동대와 물리적 충돌 현장에서 경찰과 학생들이 각목들고 싸우는 참담한 피바다를 보고 놀란다. 이에 대해 아버지와의 대화를 하던 중 아버지가 ‘비과학적인 작전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민심을 얻어야한다’ ‘민족의 마음을 모르고는 세계주의자 될 수 없다”는 말에 반발심을 갖게 된다.

일본만으로는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일본의 민족주의자란, 억압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처럼 시민의 한 사람으로 되고 말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것에 비해서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 등의 피식민지의 민족주의자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혁명을 계속해서 지향해 왔다. 그것은 왜일까?

나는 민족주의자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와의 연대를 목표한 국제주의자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계를 뛰어넘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_ p.51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1967년 ‘10.8 하네다 투쟁’ 계기로 학생운동의 실패 절감, 투쟁방식 전황 고민하게 되었고,
“‘일본에서는’ 그리고 ‘일본만으로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 일군의 학생운동가들, 레바논 베이루트 활동 근거지 삼아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참가하게 되었다.

마침 PFLP도 1970년 하이재킹선데이 – 여객기 4대 납치 사건 – 이후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에 시게노부는 1971년 25살 나이로 아랍에 도착해 요르단, 이스라엘, 시리아 국경 지대 게릴라 최후 거점에서 훈련 받으며, 레바논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베이루트의 조용한 저택에서 PFLP 국제부장, 벤구리온 공항 작전의 기획자 압 하니를 만났고 레일라 칼리드, 가산 카나파니를 비롯해 당시 PFLP 의장. 조르쥬 하바쉬 등 50여명의 동지들을 만난다. 여성,남성할 것 없이 중년 이상의 동지들  많은 것을 보고 그들의 생활이 곧 혁명임을 느꼈다. 특히 모든 해방조직이 청년동맹, 부인단체 만들어 유치원 경영, 병원 경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여성들의 노동(자수 등), 기예, 전통기술 동원한 경제활동의 방식에 눈뜬다.

#3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팔레스타인해방운동

당시 주요 국제 정세

1945년 2차세계대전 종식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언 – 중동전쟁 한달여

1950년대

  • 동유럽 사회주의 혁명을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냉전,대립해가는 시대.
  • ‘민족자결주의’ – 민족해방운동 흐름 “민족의 운명은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
  • 과거 영국,프랑스 등의 식민지는 차례대로 정치적 독립을 이룩
    • 1950년대 초 모로코 전쟁
    • 1952년 케나 마우마우 봉기
    • 1954년 알제리 전쟁
    • 1955년 베트남 전쟁
    • 1956년 체게바라 투쟁 등
  • 일본은 전범 재판, 재벌 해체 등 민주화가 여러가지로 일어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거치며 흐름이 바뀌었음.
  • 미국은 일본에게 ‘아시아의 반공 방파제 역할’ 부여 – 미국은 자민당과 연루된 전범들을 석방하고 친미세력을  구축, 일본 재건을 위해 일할 것을 요구
    => 이런 흐름속에서 팔해방 운동도 반식민지 운동으로써 활기를 띄었고, 다양한 운동조직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1967년 6월: 3차 중동전쟁

  •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 (1967.11.22, 이스라엘에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시나이반도, 골란 고원에서의 철수 촉구)
  • 아랍 민족주의 주창하던 각 국 정부의 무용성, 아무런 징벌을 못내리고 있는 모습에 팔민중 분노. 아랍국가에 의존하고 있던 팔레스타인들, 스스로 무장 결의.
  • 베트남 해방 전쟁에 호응해 전세계 반제국주의, 반식민지 독립운동으로서 일어나는 정의에 뿌리를 둔 투쟁 합류

1968년 요르단계곡 알 카라메흐에서 아라파트가 이끌던 파타가 이스라엘군 격퇴

“점령당한 조국 팔레스타인 전 영토, 우리 힘으로 되찾는다” 무장저항의 시작

“억압받는 인민의 외침은 총 밖에는 없다. 우리들은 조국을 계속 빼앗겨왔다. 세계는 평화를 논하고 무력항쟁을 손가락질하겠지만 가족과 형제가 죽어가는 우리들의 생명에 과연 누가 눈물을 흘려줄 것인가! 우리들의 휴머니즘에는 총밖에는 없다”

_ PLO 헌장

1970년

  • 9월 요르단국왕 후세인 1세 암살 시도 사건
  • PFLP, 요르단 사막에서 여객기 4대 납치,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 요구.
  • 이스라엘 및 국제사회에 대한 항의의 표현이라며 – 구체적 요구는 이스라엘과 스위스, 서독, 영국에 수감된 PFLP 조직원들의 석방-
  • 전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납치한 항공기 모두 폭파
    : 1970년 9월 6일. 항공기 탑승객이 가장 많은 일요일, PFLP가 각국의 팔레스타인인들 석방을 요구하며 하루 동안 뉴욕행 비행기를 동시다발로 납치. 일명 ‘스카이잭 선데이'(공중납치의 일요일) 사건

1971년

  • 요르단군, 팔 무장단체 공격해서 추방시키려함.
  • 요르단 정부군과 팔레스타인 병사간 충돌에 따른 요르단 정부 계엄령.
  • 요르단 정부의 가혹한 탄압  “암흑의 9월” – 검은9월
  • 요르단을 거점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PLO가 요르단 정부군의 토벌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은 1970년 9월. 오른손 사냥. 천명 이상의 게릴라 전사 오른팔을 잘라냄.

1971년 3월 – 베이루트의 부상

팔레스타인을 도망치듯 떠나온 사람들 중에는 이미 48년 쫓겨난 45만명 난민들도 있었음.

레바논 정부와 유엔 지시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천막 생활을 근근히 하고 있었고 이  난민촌에서 본 실상에서 투쟁이 곧 ‘민족의 일’임을 매일 깨닫게 되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 동유럽 공산권 붕괴

민족해방운동과 반이스라엘 정책을 지원하던 소련, 동유럽 제국의 붕괴

1990년 8월 걸프전 시작

1991년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주도 중동평화교섭 시작

  • 미국 국무장관 ‘일본 적군 지원 중단하라’고 일본에 전달
  • 서방세계는 적군파를 ‘테러리스트’로 명명.

#4 ‘10월 7일’과 ‘시게노부’

키워드의 함의를 조금 더 설명하자면, ‘10월 7일’을 ‘무장투쟁’, ‘시게노부’를 그 날을 지켜본 ‘우리들’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얼만큼 닮아있을까? 아니면 무엇이 다를까?

2022년 5월 그녀의 출소 당시, 주류 언론에는 그녀가 과거의 행동에 대해 사죄한다는 내용이 주요 헤드라인을 이뤘다.

“반세기 전입니다만…나는 우리의 투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내가 알지 못하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비록 시기는 다르지만 이 기회를 빌어 깊이 사과하고 싶습니다”

“It’s half a century ago … but I have hurt innocent people I did not know, by putting our struggles first” “Although those were different times, I would like to take this opportunity to apologize deeply”

_2022년 5월 출소 당일 시게노부 발언 중

하지만 기사에는 강조되지 않았으나 이 구절도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시에는 무장한 정치세력을 군대, 해방군, 혁명조직이라고 불렀습니다.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레이건 행정부와 이스라엘 정부가 반체제 ​​정치적 의도와 배경을 은폐하고 범죄화하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러시아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투쟁이 영웅적이라고 가정해 보세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침략과 합병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의 투쟁은 테러가 아니라 영웅적인 투쟁이라는 점을 그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2009년 <한겨레21>에 이런 기사도 있었다. 2000년에 수감됐으니 약 10년 만에 한국기자가 주어진 면회 허용 시간 10분을 마주해 쓴 것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무장투생 노선에 대한 반성부터 물었다’

10월 7일 이래 모든 팔레스타인인,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이 방송에 나올 때 마다 하나의 밈meme처럼 되버린 첫 질문 ‘하마스를 규탄하시나 Do you condemn Hamas’가 안 떠오를 수 없다.

1차 인티파다 1987 이후 2차가 2000년 말부터 시작되었으니 한창 변혁이 크게 일 때 수감 생활을 한 혁명가에게, 지난 10년간 팔레스타인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냐고 묻는 대신 이런 전제로 인터뷰를 한 것이다. 또한 마지막 문장은 더욱 문제적이다.

“과거 기존 체제를 폭력을 써서라도 타도하거나 바꾸려던 그의 혁명 목표는 40년 세월을 지나 소박하지만 소중한 평화운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평화운동을 지향한다는 말을 ‘소박하지만 소중한’ 이라고 표현한 것에 폄하나 비아냥이 느껴진다면 나만의 과대해석일까. 우리가 다시금 ‘평화운동’을 말할 때, 대중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왜 총을 쥐지 않을 수 없었나 전문을 적어보았다.

“총이야말로 남녀 노소를 평등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실감했었다. 어른이나 어린이도 총을 손에 들었을 때, 그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한다면 체력적 한계와 관계없이 적을 향해서 평등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총을 잡지 않으면 안 되나?
왜, 총을 잡을 수밖에 없나?

이런 물음 앞에 놓여지면,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되묻는다면, 강대국의 이기심, 돈이나 자본에 의한 지배 논리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결론을 내려본다.

사람을 다치거나 죽이지 않고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팔레스타인 해방에는 폭력이 힘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있으며, 서방측과 대결할 수밖에 없는 문재가 산적해 있다.
강대국의 폭력은 깔끔하고 세련됐으며, 피를 보이지 않고 돈이 붙어 다니는 자본의 냄새가 난다. 민중의 무장 봉기는 증오에 찬, 피비린내 나는 행위가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미숙한 투쟁을 벌인 결과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주변의 친구나 친척들이 폭력 앞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나도, 그 누구도 사람이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 이제와 나는 과거의 투쟁에서 사람을 다치게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하고, 목숨까지 잃게 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그 피해자에게 깊게 머리 사죄한다.

과연 그때 추구했던 목적 하나하나를 실현할 수 있는, 무장투쟁 이외의 방법이나 형태가 과연 있었을까, 우리들의 부족함을 인정하고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다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아랍의 가치 기준이 보편적인 세계적 기준이 아닌 것처럼, 일본의 가치 기준 역시 보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는 인간의 양심보다도 자본이나, 돈의 가치에 더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 그것이다.

‘영웅’이 될지, ‘테러리스트’가 될지 우리들을 향해 내려지는 평가가 어떤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그들은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고 언젠가 우리를 이해해 주리라고 믿고 있다.

81~83, 왜 총을 쥐지 않을 수 없었나?,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

그녀의 출소날에 쓰인 다른 외신 기사 중에도 끝에 한 줄로 이렇게 적힌 걸 봤다. ‘2017년 <재팬타임스>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게노부는 그녀의 무장투쟁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더 이상의 세부 내용은 찾을 수 없었고 그렇게 적고나서 마무리되었다.

약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게노부는 적어도 공식적으로 그렇게 평가했고, 언론은 그것을 강조해 그렇게 적었습니다. 이번 제노사이드의 시작이 된 시점에서 50년 뒤, 2073년 우리는 과연 10월 7일을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인지, 그 이유는 무엇이라 일컫을 것인지 함께 그 답을 만들어가고 싶다.

 

발표자료 다운로드: 3. 일본 적군파 간부 시게노부 후사코는 왜 팔레스타인을 위해 총을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