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스민

모하메드 엘-쿠르드, 2024년 5월 15일
원문: Rain is Coming, 번역: 리시올

아랍어로든 영어로든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매년 나는 나크바의 날에 대한 동일한 에세이 혹은 시를 다양한 방식으로 되풀이해 왔다. 언젠가는 이런 설득과 교육이 더는 필요하지 않기를 희망하며 동일한 사실들과 동일한 수치들, 동일한 지겨운 논거들로 범벅인 글을 썼다. 논지는 한결같았다. ‘몇 주년’과 ‘나크바’를 같은 문장에서 짝짓는 것이 부적절하며 76년이라는 기간이 계산 착오라는 것. 나크바를 영어로 번역한 ‘대재앙’(Catastrophe)이라는 말은 사태를 축소한다. 나크바는 급작스러운 자연 재해가 아니었기에.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비극적 유물인 것도 아니다. 나크바는 조직적이고 현재 진행형인 식민화 및 집단 학살 과정으로, 1948년에 시작되지도 종결되지도 않았다. 가해자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범죄 현장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잔해를 볼 수 없는 까닭은 잔해를 감추기 위해 소나무를 심어 놓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불사조처럼 가자 북부에서 새로운 유치원이 개원했다는 기사를 읽는다.[1] 벌써부터 재스민이 맑은 내음을 풍기며 교사들이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 그들을 뒤따른다고 믿고 싶다. 재스민 말고 무엇이 아이들의 칭얼거림과 전투기의 윙윙거림을 누그러뜨릴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짤막한 희소식을 꼭 붙들고 이런저런 어림짐작으로 빈칸을 채우며 지난 몇 주를 보냈다. 재스민이 거기 있는 이유는 씨앗이 허락이나 휴전이 없어도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칭얼거리는 이유는 그게 아이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집단 학살 시기에 다섯 살배기 어린이는 숫자와 알파벳 외에 또 무엇을 배울까? 시간 때울 용도로 어떤 농담을 주고받을까? 아이들의 어휘 목록은 자연히 점점 늘어나 ‘침략’, ‘봉쇄’, ‘나크바’보다도 잔인한 단어들을 포함하게 되며, 상상컨대 교사들은 나크바가, 본래의 나크바(1947~1949)가 가자의 현재 앞에선 무색해진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말해 준다. 부유한 자들조차도―하나도 남김없이―이번에는 천막 안에서 지내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재의 순간을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역사화할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1940년대 말에 대한 우리의 성찰들을 염두에 둔다면 그때 우리는 오늘의 파괴와 패배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사람들의 시신이 여러 곳의 집단 매장지에 쌓여 왔고, 그들이 크고 작은 손목은 플라스틱 끈으로 묶여 있다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니까. 한때 우리가 구전으로 내려온 역사나 경고성 이야기로 들었던 참상들이 오늘 온라인에서 끊임없이 생중계되고 있으며, 우리 기억에 영원히 각인될 것이다. 지난 일곱 달은 은유조차도 전쟁에 희생되었음을 입증했다. 이전엔 비유적이었던 것이 이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축자적인 것이 되었다: 피 묻은 수염, 숲속에 덩그러니 놓인 가구, 천장 선풍기에 매달린 팔,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아이를 낳는 여자. 상투 어구들이 땅을 뒤덮는다: 잔해 사이에서 자라는 식물, 시멘트에서 피어나는 꽃, 기타 등등. 벌어지는 너무나 많은 일이 초현실적이다. 폐허 아래서 부패한 몸들을 보도할 때 기자들은 거의 시인이 된다. 의사들은 내 소설 교수들이라면 비현실적일 정도로 삽화적이라고 불렀을 법한 두문자어들을 발명했다. 사방이 죽음이다.

그러니 팔레스타인에 대한 글이나 발언을 시작할 때 상실을 보려는, 오직 상실만을 보려는, 이 상실에서 생존에 대한 간청을 발견하려는 유혹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고통받았어요. 우리는 우리 말을 듣게 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충분히 고통받았어요. 너무나 자주 주범이 빠진 채로 우리의 고통이 보도되고, 우리의 비통한 절규는 역사와 정치 바깥으로 내몰린다. 우리에게는 민족적 열망도 일굴 땅도 없다. 우리의 실존은 순전히 기계론적이다― 정책과 절차는 우리에게 우리가 재수 없게도 죽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입시킨다. 무덤을 향해 결정론적으로 행진하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 불운한 이방인으로, 노쇠해 미래라곤 보이지 않는 이방인으로 마주한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있으며 언제나 그래 왔다. 우리가 정복과 식민화의 대상이며 환경의 산물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또한 우리는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존재다. 피비린내 나는 우리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가족을 잃고 강탈당하고 추방당하고 굶주리고 도살당하고 투옥당했다. 그러나 우리는 굴복을 거부해 세상을 경악시켰다. 학살과 침공이 벌어질 때마다 임시변통으로 만든 무기와 정교하게 제작한 무기―화염병, 라이플, 투석기, 로켓―를 들고 맞서 싸운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언제나 투쟁이 있었고 언제나 재스민이 있었다.

그와 유사하게 우리의 적에게도 더 많은 것이 있다. 시온주의는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막강한 힘을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오늘날 그 허울 뒤편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하다. 순진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적의 역량이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국과 그 용병 들의 힘을 가볍게 보자는 말이 아니다. 또 순교자 4만 명의 압도적인 무게감을 축소하자는 것도, 운동복 차림으로 탱크와 마주 선 남자들을 낭만화해 이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자는 것도 아니다. 자유 투사들은 자신의 적수가 골리앗임을, 전황이 불리함을, 돌을 집어 드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여명이다. 면밀한 조사―국영 매체를 시청하고, 글로벌 서사의 변동을 청취하며, 급진 운동의 르네상스를 목격하고, 심지어는 아무 공항의 화장실에 적힌 낙서를 읽으면서―를 통해 우리는 이것이 새로운 여명임을 발견한다. 시온주의는 여전히 가공할 힘을 지닌 적수일지도 모르지만, 또 벌벌 떨며 나이 들고 있는 짐승, 저 자신의 중요성이 시야를 가려 앞을 보지 못하는 짐승이다. 그런 만큼 예측이 불가능하다. 때로 그것은 당신을 덮쳐 송곳니로 물어뜯는다. 때로 그것은 종이 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발견은 식민자가 무적이라는 신화를 산산이 부서뜨릴 뿐 아니라 해방이 달성 가능한 것임을,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미래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집요하게 공습이 펼쳐지고 도시들이 파괴되는 마당에 재스민의 개화에 집착하는 것이 경솔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겐 모든 것을 볼, 모든 것을 찾을(look for) 의무가 있다. 그림의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살피려면 말이다. 치명적이고 위험하며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지만 나크바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는 변해야 마땅하기 때문에 변하고 있다. 지옥에서도 씨앗이 싹틀 수 있다면 혁명 또한 그렇다. 전화 통화 중에 어머니가 내게 말한다. 비가 오고 있고(rain is coming) 신은 전능하시다고.


역주: [1]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의 첫 표적이었던 가자 북부의 가자 시티에서 ‘시라즈 알-아크사 유치원’이 개원했다. 가자 시티를 비롯한 북부의 아이들에게 심리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