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아랍영화제에서 팔레스타인 영화 《200미터》를 함께 본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들의 감상문

자아

<200미터>.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장벽으로 눈 앞의 200m 목표지점을 200km쯤 돌아가는, 점령이 만든 오디세이.

서안지구에 사는 주인공 무스타파는 끊임없이 기다린다. 이스라엘로 건설노동을 하러 가기 위한 통행 허가증을 기다리고, 매일 새벽 대규모 검문소 철장 안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서안지구에서 출발하는 9인승 미니밴에 더 많은 탑승객이 차기를 한없이 기다리고, 미니밴이 더이상 갈 수 없는 중간 지점에서 이스라엘 번호판이 달린 ‘불법’ 차량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아들이 사고를 당해 이스라엘 병원에 있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박차고 집을 나서지만, 도착 시간을 장담할 수 없고, (트렁크에 몸을 구긴 채 이동하느라) 지금 어디쯤 왔는지도 알 수 없다. 이렇게 일상은 모험이 되고, 모든 결정은 이스라엘이 쥐고 흔드는 ‘운’에 달렸다.

나의 팔레스타인 친구들이 입에 달고 살던 “인 샤알라”가 떠오른다. ‘신의 뜻대로’, ‘신이 허락하신다면’이라는 이 아름다운 축복의 말은 팔레스타인에서 만큼은 종종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일상 속 아주 작은 결정조차도 이들이 축복하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군인의 ‘자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내가 한 시간 뒤에 어디에 도달할 지를 신에게 기도하는 상황은 잘못됐다.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이 전략적으로 앗아가고 있는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한치 앞이고 최소한의 존엄을 담보하는 여유다. 더 나은 선택과 내일을 살아갈 동력이다.

승객이 더 오기까지 마냥 기다리는 미니밴 속에서 무스타파는 심난함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남의 속도 모르고 10대 동승객 라미는 낄낄 거리며 캥거루가 불알을 긁는 영상을 들이밀고, 운전 기사는 길가에서 세월아 네월아 담배를 태우며 마을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 차 안에는 안그래도 신명나는 아랍 음악이 귀 따갑게 빵빵 울린다. 무스타파의 요청에 조수석에 앉은 승객은 볼륨을 좀 줄이지만 무스타파는 이내 몸을 숙여 아예 음악을 꺼버린다.

별 장면이 아닐 수도 있는데, 나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단번에 저 음악을 꺼주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무뎌지지 않는 일, 무스타파의 조급함과 분노에 공감하는 내가 있음을 아주 작은 행동으로 알려주는 일 말이다.

수인

눈물 나는데 반갑고 못 가니 더욱 그리운 사람들과 그곳을 만남

무스타파가 살와와 3명의 아이들(아쉽게도 마리얌 밖에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과 살 부비며 함께 살고 싶어 하는 마음, 살와가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경제활동을 하느라 고단하면서도 무스타파를 그리워하고 함께 지내고 싶어 하는 마음에야 견줄 수 없겠지만, 이 영화를 보며 팔레스타인과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소소한 디테일들, 무스타파가 엄마랑 빵 먹는 모습, 골목의 아이들, 낡은 자동차, 황량해보이는 산들, 서로에게 인정 넘치는 말과 행동들, 아무 곳에서나 담배 피우는, 언제나 명랑해보이는 그리고 끔찍하게 높게 보이던 장벽들, 펄럭이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국기들, 왠지 주눅들게 만드는, 편안한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이스라엘 군인들…

어느 곳에건 어떤 상황에서건 삶은 계속되지만 그리운 사람은 그리워만 하지 말고 만나고, 어딘 가를 가고 싶은 사람은 장벽을 돌고 돌지 말고 바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뎡야핑

‘살와’는 두 집 살림을 하는 팔레스타인 여성 노동자이자, 가장이다. 하루 겨우 2시간 잠을 자며 일하고, 아이 셋을 돌보고, 아이들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거대한 장벽을 너머 남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간다.

거대한 장벽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집엔 남편 ‘무스타파’가 산다. 무스타파의 삶 역시 쉽지 않다. 두 집의 직선거리는 200미터에 불과하지만 무스타파는 살와처럼 장벽의 군사검문소를 쉽게 통과할 수 없다. 이스라엘군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군대의 허가가 필요할까? 무스타파가 ‘테러범’이라서? 물론 아니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군사점령당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 누구나 이스라엘군의 허가 없이는 장벽을 건널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무스타파가, 이스라엘이 장벽의 구실로 내세운 ‘테러범’이었다면 애초 이스라엘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 허가증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노동 허가증이 있어도, 새벽 군사검문소에서 2시간을 기다린 끝에 무스타파는 통행증 기간 만료란 이유로 장벽 통과를 허가받지 못했지만.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점령 정책에 따라(장벽은 이미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가 불법이라 결정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은 하루하루 침식된다. 출근을 못하고, 약속을 못 지키고, 하루하루가 예측불가능한 요소로 가득 차 있다. 영화의 주된 플롯은 아들 ‘마지드’의 입원 소식을 접한 무스타파가 병원에 가는 여정을 좇는다. 아들이 얼마나 다쳤는지 모른 채 불안한 마음을 안고 200미터 거리를 온종일 돌고 돌아가며 마주치는 사건마다 군사점령의 현실이 드러난다.

보면서 궁금했다. 관객들은 이걸 영화적 과장이라고 생각할까? 실제로 저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할까? 지구 한 쪽에선 나처럼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드물게 겪는 일이라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살와’와 아이들은 어떻게 장벽 너머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는 걸까? 이스라엘은 1948년 원래 팔레스타인이었던 땅 위에 들어섰다. 이스라엘은 건국을 전후해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학살/추방하는 대규모 인종청소를 저질렀지만 다 죽이고 내쫓지는 못했고,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인구의 20%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즉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고, 살와는 그 중 한 명이다.

장벽은 땅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를 가른다. 이스라엘 쪽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들 마지드는
‘더러운 서안지구놈’이라며 팔레스타인 아이들로부터 학교 폭력을 겪는다. 자식들 교육 문제를 가지고 살와와 무스타파는 계속 갈등한다. 아픈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일하려 들면서도 막상 이스라엘 시민권을 얻어 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 무스타파에게 살와는, 그리고 자신과 상의 없이 이스라엘 유소년 축구 캠프에 마지드를 보내겠다는 살와에게 무스타파는, 실망하고 화낸다. 기본 플롯이 무스타파의 여정이라서 영화가 두 사람의 관계를 자세히 보여주지는 않지만, 단편적 장면만으로도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 어떤 시간을 통과했을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이스라엘 시민권자들은 서안지구 출입이 자유롭기 때문에, 아마 살와는 서안지구의 대학에서 무스타파를 만나지 않았을까? 학생 시절 점령자에 비타협적이던 매력적인 모습이, 함께 삶을 나누며 이젠 고집불통으로 여겨지진 않을까? 그러면서도 그게 옳으니까 전면적으로 설득할 수도 없고.. 생각을 같이 하는 부분이 생활에서 빛바래고 퇴색할까 두렵지 않을까? 등장인물의 전사가 그려진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이 뿐 아니라 영화는 어떤 과장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잘 그려냈다. 예컨대 무스타파가 일자리를 찾아 이스라엘로 건너가, 당연하다는 듯이 히브리어로 자기 할 말만 하는 이스라엘인의 집을 지어주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라는 점도 그렇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경제구조를 조직적으로 무너뜨렸고, 점령자의 집을 지어주는 것이 다른 취업 자리를 찾기 어려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선호도 높은 직업이 되고 말았다. 아침 저녁으로 4시간 동안 군사검문소에서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무스타파의 여정에 들어있는 한 ‘외국인’을 관객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다. 스포라서 쓸 순 없지만, 일단 외국인도 팔레스타인 가면 정말 흔히 보이는 전형적인 서양인 스타일 찰떡이라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 존엄을 지키는 무스타파에게서 내가 아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모습을 보았다.

결국 무스타파는 여정에서 만난 동료들을 챙기며 가족들에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만다. 무스타파가 처한 군사점령의 부당한 현실의 벽은 견고하고, 그래서 살와와의 갈등 또한 완화될 조건 자체가 없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즉 존재가 저항이라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외침이 또다시 와닿는다.

무스타파처럼 팔레스타인 민중은 종국에는 해방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