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5일, 질베르 아슈카르
* 번역: 김재훈
지난 며칠간 가자 지구는 오늘날의 그 어느 갈등보다도 극명하게 글로벌 남-북 분열을 드러냈다. 서구 정부들은 추잡한 만장일치를 통해 이스라엘 국가를 무조건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아무 거리낌 없이 표명했다. 이스라엘 국가가 75년간의 지역 갈등 중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팔레스타인 인민을 상대로 이미 전쟁 범죄 캠페인에 착수했다는 것이 명백해진 시점이었는데도 말이다. 진정으로 구역질 나는 만장일치였다. 10월 7일 이래 서양 정부들은 앞다퉈 이 노력―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런던 의회, 파리 에펠 탑, 워싱턴 백악관에 이스라엘 국기를 내건 것부터 이스라엘에 군사 장비를 보내고 미국과 영국이 시온주의 국가에 대한 연대의 제스처로 동지중해에 함대를 증파한 것,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정치적 지지를 표명하는 각종 형태를 금지하고 그리하여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를 축소한 것까지―을 전시했다.
이 모든 일은 평소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대해 보도할 때 서양 매체들이 보여 온 편파성이 절정에 달하는 것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 비탄에 잠긴 이스라엘 사람들(특히 여성)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등장하는 빈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하마스의 알-아크사 홍수Al-Aqsa Flood 작전이 비무장한 사람들에 가한 폭력의 이미지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중이다. 특히 서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음악 축제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재앙보다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엄습한 재앙에 의해 훨씬 더 많이 일깨워지는 […] 나르시시즘적 연민”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하마스가 작전을 개시한 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시민들에게 자행한 대규모 공격은 규탄은커녕 보도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서양의 주요 정치 지도자와 매체는 230만 명의 인구를 대상으로 한 물, 음식, 연료, 전기의 전면 봉쇄라는 노골적인 전쟁 범죄, 또 100만 명이 넘는 시민에게 도시를 떠나거나 함락된 거주지에서 죽음을 맞이하라고 명령한 (마찬가지로) 노골적인 인도주의적 법률 위반조차도 묵인하는 실정이다.
이들은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에 나오는 ‘야만적 관습의 억제를 위한 국제 협회’를 다시 설립한 것만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어둠의 심연』에서 커츠 대령은 협회에 제출할 보고서 말미에 다음과 같은 섬뜩한 후기를 덧붙인다. “짐승들을 절멸시키자!”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요아브 갈란트의 최근 선언은 커츠의 처방 못지않게 사악하다. “가자 지구의 전면 봉쇄를 명한다. 가자에는 이제 전기도, 음식도, 연료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차단한다. […] 우리는 인간 동물과 싸우는 중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 행동할 것이다.”
전혀 놀랍지 않게도 서양 매체들은 하마스의 작전을 홀로코스트 이래 유대인을 겨냥한 최악의 공격으로 묘사하는 이스라엘 매체들의 말을 그대로 읊고 있다. 이 매체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나치화라는 익숙한 패턴을 되풀이함으로써 이들의 비인간화와 절멸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진실은 다음과 같다. 하마스의 작전이 일부 측면에서 끔찍할지언정, 그 어떤 유효한 역사적 관점에서 봐도 이들은 나치의 제국주의 폭력을 계승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이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역사적 순환으로 새겨진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식민주의 강탈과 억압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식민주의에 맞서는 글로벌 남반구 인민의 투쟁이다. 하마스의 이번 행동 저변에 깔린 사고 방식을 이해할 열쇠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아니라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정신과 의사이기도 했던 정치 사상가가 피식민자의 감정을 해석한 저작으로 이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이다. 이 책에서 파농은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선 피식민자들(특히 알제리 사람들)의 투쟁을 숙고했다.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을 충격적일 정도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계획의 추동력이 되고자 결심한 원주민은 언제든 폭력에 대비하고 있다. 금제로 가득한 이 협소한 세계를 문제삼기 위해서는 절대적 폭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다. […]
폭력은 식민지 세계의 질서를 지배한다. […] 원주민들이 직접 역사를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금지된 구역으로 밀고들어갈 때 이들은 바로 그 폭력을 내세우고 구사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식민지 질서를 쳐부수는 것은 매우 명료하고 매우 당연한 식민지 민중 개개인이 취해야 할 행동 양식이 된다. […]
그러나 결과는 심히 불균등하다. 비행기의 기관총 사격과 함대의 포격은 범위와 공포 면에서 피식민자의 대응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피식민자 중 가장 소외된 이들은 테러와 대항 테러의 진자 운동을 통해 최종적으로 미혹에서 벗어난다. 이들은 어떤 미사여구로 인간의 평등을 치장하더라도 부조리를 감출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카모디의 매복 작전에 참가한 일곱 명의 프랑스인이 죽거나 부상당하면 문명화된 양심의 격분을 일으키는 반면, 매복 작전으로 구에르구르 마을과 제라 촌락이 약탈당하고 주민이 학살돼 봤자 아무 일도 아니라고 여겨지는 부조리를.
알-아크사 홍수 작전에서 하마스 전투원들의 일부 행동이 ‘테러리즘’적이었을까? 이 말이 고의로 비무장 인민을 암살하는 것을 뜻한다면 이들의 행동은 분명 테러리즘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지난 17년간―가자 지구 내에 주둔하며 통제하는 것이 더 큰 비용을 초래한다고 판단한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밖에서 통제하기 위해 가자 지구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은 2006년부터―수천 수 만의 가자 지구 시민을 고의로 살해한 것 역시 테러리즘이다. 나아가 역사적으로 국가 테러리즘은 비국가 집단의 테러리즘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를 냈다.
마찬가지로 하마스 전투원들의 일부 행동이 ‘야만’이었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이 야만의 충돌의 일부라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관련해 9/11 공격이 벌어진 20여 년 전에 내가 쓴 대목을 인용해 보겠다.
개별적으로 볼 때, 각각의 야만적인 행동은 도덕적 관점에서 똑같이 부끄러운 짓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문명화된 윤리는 국가 테러나 비정부 테러를 통한 민간인 혹은 아동의 암살을―무차별적이든 계획된 것이든―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공정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형태의 야만성을 똑같이 거부하는 형이상학적 윤리로 우리 자신을 포장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야만은 정의의 저울 위에서 똑같은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야만이 ‘정당한 자위’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야만은 정의상 그 자체로 언제나 부당하다. 그렇다고 해서 두 종류의 야만이 충돌할 때 억압자로 행동하는 강자의 책임이 더 크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비합리성을 표방한 사례를 제외하고 약자의 야만은 거의 언제나 강자의 야만에 대한 대응이었고 이는 충분히 논리적이다. 그게 아니라면 뭐 하러 궤멸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약자가 강자를 도발하겠는가? 덧붙여 말하면 강자가 자신의 책임을 은폐하고자 하면서 적수를 제정신이 아닌 악마이자 짐승으로 묘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점령과 억압에 맞서 싸운다는 하마스의 구상에서 가장 결정적인 쟁점[비판점]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에 기여하고 더욱더 많은 이스라엘 사람을 설득해 이 대의에 합류하도록 만드는 대신, 하마스의 전략은 유대계 이스라엘인의 민족주의적 통합을 [오히려] 부추길 것이며 시온주의 국가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권리와 존재를 한층 심하게 억압할 구실로 작용할 것이다. 무장 대치를 통해 팔레스타인 인민이 민족 해방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은 비합리적이다. 이스라엘 국가가 군사력 면에서 훨씬 우월한 상황이니 말이다. 이제까지 벌어진 팔레스타인의 투쟁 중에서 가장 큰 효과를 거둔 것은 비무장 에피소드였다: 1988년의 [비폭력] 인티파다[민중 봉기]는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체, 군대의 깊은 위기를 촉발했으며, 서양 나라들을 포함해 전 세계가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크게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이번 작전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이제껏 개시한 공격 중에서 가장 스펙터클했다. 그 결과 장기간 이어져 온 폭력과 대항 폭력의 순환에서 살인적일 정도로 잔인한 보복이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패턴을 훌쩍 넘어설 기회를 [이스라엘 측에] 제공하고 있다. 현재 닥쳐오고 있는 것은 바로 두 번째 나크바―“대재앙”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로, 1948년 신생 이스라엘 국가가 자신이 정복한 영토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원래 주민 대부분을 강제로 추방한 것을 가리키는 명칭―다. 네오 나치를 포함하고 있는 현재의 이스라엘 정부를 주도하는 것은 리쿠드당 대표[베냐민 네타냐후] 및 가장 악명 높았던 1948년의 팔레스타인 학살(데이르 야신 학살Deir Yassin massacre)을 저지른 정치 집단들의 계승자들이다. 베냐민 네타냐후는 아리엘 샤론과의 반목을 이끈 인물이고, 샤론이 총리이던 2005년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샤론이 내리자 재무 장관 직을 사임했다. 그 직후 샤론은 네타냐후가 장악해 온 리쿠드당에서 탈당했다.
리쿠드당이 주도하는 이스라엘 극우는 대-이스라엘이라는 목표를 가차 없이 추진해 왔다. 영토 면에서 이는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포함해 영국이 위임 통치했던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 팔레스타인 전체를 아우른다. 하마스가 작전을 개시하기 며칠 전에 네타냐후는 UN 총회 연설에 대-이스라엘 지도를 들고 나왔다. 누구라도 의도를 눈치챌 만큼 노골적인 신호였다. 이것이 가자 지구 북부 주민들에게 남쪽으로 떠나라고 한 명령이 민간인 거주 지역을 고의로 파괴하는 것에 대한 통상적인 위선적 핑계에 그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민간인 틈에 숨어 있다면서(실로 부조리한 비난: 하마스가 도시를 벗어나 황야에 지내면 훨씬 우세한 원격전 수단을 보유한 이스라엘에 초토화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마스에게 [민간인 살해]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가자 지구 사람들이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로 쫓겨나는 2차 추방의 전조임이 틀림없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박멸하겠다는 구실로 나크바 이래 가장 큰 규모로 두 번째 인종 청소와 영토 정복을 실행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곧바로 1948년의 강제 추방을 떠올렸다. 당시에 이들은 전쟁을 피해 달아났지만 자신들의 도시와 마을에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자 지구에서 자신이 두 번째 강제 추방에 맞닥뜨렸고 이것이 한층 심각한 강탈과 정착민 식민화의 전조임을 알아차리고 있다. 이 2차 나크바는 1차보다 더 많은 피를 요구할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살해당한 팔레스타인 사람 수는 이미 1948년 사망자 수에 근접했으며, 이스라엘의 맹습은 이제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대중이 대규모로 결집해야 한다. 그리하여 서양 정부들이 이스라엘을 압박해 이스라엘이 사악한 전쟁 목적을 충족하기 전에 전쟁을 멈추게 해야만 이 두려운 결과를 방지할 수 있다. 이는 극도로 긴급한 사안이다. 분명히 말해 두건대 임박한 대재앙은 중동에 국한되지 않고 서양 나라들로도 퍼져 나갈 것이다. 물론 수십 년간 그래 왔다. 하지만 이번 비극의 규모는 더욱 클 것이다.
원문: Gaza: The Impending Catastrophe and the Urgency of Stopping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