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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06/08ㅣ위클리경향 878호

 

ㆍ1970년대 중반 남아공과 접촉… ‘핵 보유’ 사실 새로운 증거

 

이스라엘이 1970년대 중반에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권에 핵무기를 판매하려 한 문서가 공개되면서 이스라엘 핵 문제가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입수해 5월 23일 폭로한 문서는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글로 쓰인 첫 증거라는데 의미가 있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이 5월 5일 예루살렘 대통령 관저에서 체코 외무장관과 회담 도중 웃고 있다. 예루살렘/AP연합뉴스


남아공의 기밀문서가 공개되기 이전까지 이스라엘 핵 보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근거로는 두 가지가 언급됐다. 하나는 1986년 이스라엘 내부고발자가 영국 일간 선데이타임스에 폭로한 디모나 핵시설 관련 자료다. 또 하나는 1979년 이란 혁명 후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입수한 문서로, 이란 국왕이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이스라엘에 관심을 표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가디언이 폭로한 남아공 기밀 문서는 두 근거보다 구체적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남아공에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예리코 미사일 판매를 공식 제의한 것은 1975년 3월 31일이다. 그러나 본격 협상은 두 달 뒤인 6월 4일 이뤄졌다.

 

페레스 대통령 보도내용 전면 부인

 

당시 피터 윌렘 보타 남아공 국방장관과 현 이스라엘 대통령인 시몬 페레스 국방장관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핵 협상을 위해 만났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보타 장관은 ‘적당한 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제한된 숫자의 ‘샬레’에 관심을 표명했다. ‘샬레’는 이스라엘산 예리코 미사일의 암호명이다. 페레스 장관은 “‘적당한 탄두’는 세 가지 사이즈를 이용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가디언은 세 가지 사이즈 탄두는 재래식·화학·핵무기를 지칭하며, 보타 장관이 ‘적당한 탄두’라는 완곡어법을 쓴 것은 이스라엘이 핵무기 문제에 민감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보타 장관은 비용 문제 때문에 협상을 진전시키지 않았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또 양국 국방장관이 핵 협상을 하기 두 달 전인 4월 3일 합의 내용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공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군사동맹에 관한 비밀 합의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 측은 가디언 보도 이튿날인 5월 24일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은 남아공과 핵무기 거래 협상을 한 적이 없다”며 보도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성명은 “유감스럽게도 가디언 기사는 확고한 사실이 아닌 남아공의 문서에 대한 선택적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문서 등을 남아공 정부로부터 입수해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과 이스라엘 간 관계를 다룬 책 <무언의 동맹(Unspoken Alliance)>을 최근 출간한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의 부편집장인 사샤 폴라코프서랜스키는 페레스 대통령 측에 대해 반박했다. 그는 25일 미국의 TV·라디오 프로그램인 <디모크러시 나우>에 출연해 “내가 책에서 밝힌 것은 가디언이 공개한 문서뿐만 아니라 네 가지 문서에 바탕해 해석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왜 남아공과 핵무기 거래를 하려고 했을까. 해답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과 이스라엘의 끈끈한 유대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때부터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이 때문에 1960년대까지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과 유대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1973년 ‘4차 중동전쟁’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새로운 식민주의 국가로 인식하면서 이들과 관계가 멀어졌다. 새로운 아프리카 동맹국을 찾아 나선 이스라엘은 남아공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스라엘 디모나 핵시설 전경. | 연합뉴스

 

이스라엘 핵무기 판매 제의가 있은 이듬해인 1976년 존 포르스터 당시 남아공 총리는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나치에 학살된 600만 유대인을 기리기 위해 만든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찾았다. 포르스터가 나치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남아공 파시스트라는 점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포르스터를 자유의 지도자라고 찬미하고 환영 만찬에서는 “이스라엘과 남아공의 공동 이상, 정의와 평화적 공존을 위한 희망을 위해” 건배할 것을 제의했다.

 

이스라엘에 부정적이던 남아공이 적극적으로 돌아선 이유는 무엇일까. 남아공이 1976년 말에 제작한 연감에서 찾을 수 있다. 연감은 남아공과 이스라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적시했다. 공통점은 “두 나라는 대부분 흑인들이 사는 적대적인 세계 안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남아공은 억지력 차원과 주변국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미사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폴라코프서랜스키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남아공은 핵 확산 방지를 위해 우라늄 농축 원료로 사용되는 옐로케이크 통제에 관한 안전장치를 풀 정도로 발전한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남아공에 열핵무기 제작에 필요한 트리튬(삼중수소) 30g을 제공했다. 트리튬 30g은 핵무기 몇 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다.

 

남아공, 이스라엘 무기 최대 고객

당시 양국의 긴밀한 유대관계의 중심에 시몬 페레스 국방장관이 있었다. 페레스는 5년 전 아파르트헤이트 백인 정권과의 유대관계에 관한 도덕성을 묻는 가디언 기자의 질문에 “당시 남아공 흑인운동 단체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함께 우리를 반대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동의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974년 당시 남아공 내무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불의에 대한 공동의 증오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에 대해 강조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남아공 백인 정권에 대한 깊은 애정은 페레스뿐만 아니라 라파엘 에이탄 전 참모총장, 아리엘 샤론 전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은 1980년대 후반 아파르트헤이트 남아공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고조되자 관계 단절을 모색했다. 그러나 보안기관이 반대했다. 알론 리엘 전 남아공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1986~1987년 무렵 백인에서 흑인으로 관계 전환을 모색하려 하자 보안기관은 ‘미쳤냐,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들은 과거 1970년대 중반에 우리의 주고객이던 남아공이 아니었다면 방위산업과 항공산업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구했다. 어쨌든 그것은 사실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북한, 인도, 파키스탄과 함께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그동안 핵무기 보유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핵 모호성’ 정책을 고수해 왔다. 페레스 대통령의 전면 부인에서도 보듯이 이번 문서 공개로 이스라엘의 핵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 국가들이 모색하고 있는 ‘중동 비핵화’ 구상은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조찬제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helpcho65@kyunghyang.com>

 

출처 : 위클리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