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잘못 안 모양인데, 저는 알카에다는 반대해도 하마스는 지지하듯이 알자르카위와 사담 이븐 후세인은 처벌해도 무장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한 겁니다. '모든 총을 내려놓으라'는 요구는 - 침략자인 영/미군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 "받아들여질 수 없는 요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전에 쓴 글을 '잘못된 글'이라고 여기지 않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죠.
오마르씨는 "미국의 힘이 아랍인들과 무슬림들의 힘을 초월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슬림들이 미국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대의 명분을 가지고 미국과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셨는데, 그 말대로라면 아랍인들은 간디처럼 팻말만 들고 가서 "자, 때리십시오.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싸우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냥 맞고 있어야겠군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의 압제자들은 '비폭력 투쟁'을 '피해자들이 나약한 증거'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서기 1949년 남아프리카의 정치단체였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영국 식민 당국과 아프리카너(영국인보다 2세기 먼저 남아프리카에 온 네덜란드계 백인들. 넬슨 만델라를 잡아가둔 국민당이라는 인종주의 정당도 이들이 만든 것이다)에게 맞서려고 "불매운동, 파업, 시민 불복종, 비협조"라는 비폭력적인 수단을 채택했습니다(이는 만델라가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보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죠).
서기 1952년 만델라는 이러한 노선에 바탕을 둔 "불복종 저항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불복종 저항 운동 기간 동안 모두 8,000명의 지원자들이 의도적으로 인종차별법을 위반하고 감옥에 들어갔"어요. 비록 그해 10월에 국민당 정부가 보낸 경찰이 모임에서 "발포"를 하여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인 투쟁 자체는 서기 1961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 국민당 정부가 '아,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생각하고 억압을 끝냈나요? 자신의 잘못을 직접 시인했습니까? 흑인 구역을 '점령'하는 짓을 끝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흑인에게 "어떤 집회에도 참석할 수 없"고 "3명 이상의 사람이 모이면 집회로 간주"해 잡아갈 수 있으며, "다른 금지령을 받은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금지령을 받은 사람의 말을 출판하거나 인용하는 것도 불법"인 '금지령'이라는 법을 만들었고, 실업자라는 이유로 "체포를 피할 수가 없는" 법을 만들며 "아프리카인이 백인 또는 인도인, 유색인(흑인과 백인, 또는 흑인과 바라트[:인도]인, 바라트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지정된 지역에 사는 것도 범죄"가 되는 법을 안겨 주었습니다.
"대규모 항의 집회에서 연설"을 하면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난입"을 해대고, "출근거부"와 "통행증 불태우기"라는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규모 일제검거"를 했단 말입니다.
더 큰 선물은? 서기 1960년에 주어졌죠. 국민당 정부는 흑인들의 비폭력 투쟁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ANC를 "금지"했습니다. 이게 '비폭력 투쟁이 가져다준 확실한 선물'이죠!
결국 비폭력 투쟁을 제안했던 넬슨 만델라도 이런 현실에 실망해 "우리의 해방 투쟁 조직들은 계속해서 비폭력 정책을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내란보다는 평화로운 변화를 원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참는 데도 한도가 있죠. 정부는 우리의 평화로운 투쟁을 우리가 약하기 때문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정부의 완력을 더 이상 비폭력적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은..바로 정부입니다. 그들이 자초했습니다. 정부는 권리와 자유에 대한 평화로운 요구를 모두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움콘토 위 시즈웨('나라의 창'이라는 뜻. 줄여서 '움콘토'라고 부른다 - 옮긴이)' 가 우리의 최전방 방어선에 나설 것입니다."라고 선언한 뒤 무장투쟁으로 돌아섭니다.
움콘토는 서기 1961년 넬슨 만델라에 의해 조직되어 서기 1990년(드 클레르크 대통령이 넬슨 만델라를 풀어준 해)까지 무려 서른 해 동안 국민당 군대를 공격하고, 남아공의 발전소와 우체국에 폭탄을 던지면서 싸웠죠.
우스운 것은 비폭력 투쟁을 할 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세계 여론이 무장투쟁이 시작된 다음부터야 국민당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비폭력으로 '곱고 아름답고 부드럽게' 싸울 땐 뭐하고 있었나요?).
이것이 제가 '비폭력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비폭력 투쟁은 그것을 "나약하다"고 평가하지 않고 '투쟁"으로 받아들이는 상대한테만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근거 가운데 하나죠.
티베트는요? 달라이 라마가 60년대에 벌어졌던 티베트인들의 무장 투쟁을 금지하고 대신 '비폭력 탄원'이라는 방법으로 30여년 동안 구미, 일본, 중국 정부(!)에 독립을 요청했죠. 그리고 최근에는 독립도 '포기'하고 대신 '자치권만이라도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요청을 들은 가해자(중국정부)가 어떻게 했나요? '아, 내가 잘못했어.'라고 생각하고 물러나 줬습니까?
아뇨. 그들은 달라이 라마에게 내려진 현상수배령과 암살 명령을 취소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근에는 중국군에게 "달라이 라마를 겨냥한 테러 훈련"을 하라고 명령했죠. 이게 무조건적인 비폭력에 '응답'한 중국정부의 '수준'입니다. 간디의 방법이 어디에서건 통하는 건 아니라는 게 증명된 거죠.
이번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볼까요.
서기 1936년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자들과 영국에 맞서 "총파업"이라는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맞서 싸운 적이 있죠. 같은 해 "시리아에서 벌어진 대중 투쟁이 프랑스에게 양보를 강요한 것과 이집트에서 와프드당(민족주의 정당)이 거둔 비슷한 성공에 자극"받아, '파업을 통해서 압력을 넣으면 성공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벌인 투쟁이었습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시민 불복종, 납세 거부, 자치 정부 활동 중단 등의 강령에 합의"했죠. 그러자 "영국은 야파의 주요 구역을 파괴하고 연좌제를 적용하여 처벌하고 수많은 아랍인들을 재판 없이 구금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비교적 온건한 방법'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던 거죠.
상황은 쉰 여섯 해가 흐른 뒤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서기 1991년 조 사코라는 미국인 여행자의 보고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땅인 '실완'과 '나블루스'에서는 아랍인들이 총이나 돌, 화염병을 안 들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한 적이 있다네요.
실완은 원래 아랍인의 마을이었는데, 서기 1991년에 "유태인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 가족 몇몇을 내몰았"고 "그 땅을 점거하고, 철조망을 두른 뒤, 다윗의 별(시온주의자들의 깃발 - 옮긴이)을 내걸었"죠.
그걸 항의해서 "한 50명 정도"인 아랍인들이 '정착촌 반대! 협상 지지!'라고 쓰여진 팻말을 들고 "목청껏 구호를 외치며" "자기들의 생명을 걸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론은 그들에게는 전혀 주목을 안하더라고요.
나블루스에서 일어난 시위도 이야기해야겠네요. "기자, 교사, 회계사 등 열두 명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추방"된 사건을 따지는 시위대는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며, 차도 한가운데로 행진"했죠. 시온주의자들은 전경을 보내 "최루탄"을 쏘고, "몽둥이"로 시위대를 때리고, - 이미 익숙하시겠지만 - 시위자들을 "지프와 트럭"으로 몰고 가는 방식으로 시위를 탄압했습니다. 그 때 시위대가 영어로 "PLO 만세! 이스라엘 반대!"라고 외쳤더니 전경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목격자인 조 사코에 따르면 "웃긴다는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으면서 비웃고, 구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몽둥이로 때리며 잡아 넣었답니다.
한 팔레스타인 할머니가 전경들에게 "이 악당들아! 악당들아!"라고 외치니, 전경 가운데 하나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걸 이제 아셨수? 알았으면 꺼지쇼."라고 했어요.
이게 "명분"에 입각한 "비폭력 투쟁"이 불러온 '좋은 성과'입니까? 시위대의 시위가 시온주의자들에게 죄책감을 불러오지도 못했고, 길이 잠시 막힌 걸 빼고는 그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주지 않았으며, 요구사항은 전혀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는데요!
조 사코가 가자 지구의 누제이라트 난민촌에서 전해들은 사례도 말해보죠. 시온주의자들이 점령을 반대하는 시위에 끼어들었다고 의심해 붙잡은 아랍인 아이들은 "얻어맞고, 불이 붙은 조리 기구에 얼굴이 떠밀리"는 고문을 당합니다. 그럼 그렇게 당한 아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서한다'고 말하기를 기대했나요?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안 한 사람들에게 혐의를 씌워 고문했는데도?
여기까지 말한다면, "법으로 부드럽게 풀면 되잖아!"라고 하시겠죠. 그렇지만 법 자체가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여론도 시온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데도 그게 '법으로 온건하게 타결'될 거라고 믿는다면, 그런 생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네, 바로 이 때문에 저는 당신의 주장 - "명분"으로 싸워야 한다는 주장 - 에 찬성하지 않은 겁니다. 폭력시위가 벌어지고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와야 주목하는 이런 천박한 풍토가 바뀌지 않는 이상은, 피해자가 정당방위로 폭력투쟁을 해야 깜짝 놀라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압제자들이 있는 이상은, 억눌리는 이들의 폭력투쟁은 -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 지지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귀하가 "예전에 팔레스타인 소년이 이스라엘군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방영되면서 전세계의 여론이 팔레스타인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던 적이 있었"지만 얼마 후 "이 여론은 성난 팔레스타인 군중들이 이스라엘군인을 죽인 후 몇층인가 높이에서 시신을 던지고 회손하는 장면이 방영되며 그 효과가 반감되었던 적이 있"으니 자제하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성난 팔레스타인 군중들"이 시온주의자들을 죽여서 던지기 전에는 무얼 하셨는지 알고 싶네요.
만약 그때 팔장을 끼고 구경만 하셨다면 "팔레스타인 소년"의 죽음 때문에 분노한 "성난 팔레스타인 군중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만 분노하면 뭘합니까? 성금을 보내던지, 시온주의자들 앞에 가서 파란 별이 달린 깃발을 찢고 불태우던지, 아니면 우르르 몰려가서 시위를 하고 "점령을 끝내!"라는 압력이라도 넣었어야 하지 않나요? 그러지도 않고 말로만 "팔레스타인이 불쌍해"라고 말하고 끝냈다면, 당신도 상황을 나쁘게 하는 데 한 몫한 셈이란 말이죠(저는 그 때문에 반전시위에 꼭꼭 나가고, 성금을 내고, 주위 사람들에게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널리 알리면서 압력을 넣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을 끝내고 싶으시다면, 이 모든 일을 불러온 침략과 점령을 반대하고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안 할 수 있게 '대안'을 찾아주십시오. 그러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라, 부드럽게 굴어라."라고 설교한다면 이는 불에 기름을 붓는 셈이고 평화는 전혀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덧붙임 : 또 한가지만 말합시다. 돕지도 못하고 그냥 논평만 하는 "제 3자"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피해자가 그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합니까? 만약 도와준 자가 충고했다면 모르지만 자신이 맞고 있는데 그냥 팔장끼고 구경만 했거나 "그러면 안 돼. 싸움은 나쁜 거지."라고 말하면서 분노를 부추기면 그래도 참아야 하나요(더군다나 그 구경꾼은 때리는 자에게 세뇌되어 때리는 짓을 '교화'로, 맞는 자의 반격을 '폭력행위'로 모는데도?)? 저는 그래서라도 귀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음을 밝힙니다.
저는 이라크 독립군과 팔레스타인 독립군의 활동이 빈 라덴이나 알자르카위의 망나니짓 때문에 탄압받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그 두 놈을 쫓아내고 계속 싸우자는 거였지, 투쟁 자체를 하지 말자고 주장한 건 아니니 그것만은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이상입니다.
- '용서'는 맞은 사람이 스스로 판단해서 해야지, 때린 자나 구경꾼이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씀
저는 예전에 쓴 글을 '잘못된 글'이라고 여기지 않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죠.
오마르씨는 "미국의 힘이 아랍인들과 무슬림들의 힘을 초월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슬림들이 미국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대의 명분을 가지고 미국과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셨는데, 그 말대로라면 아랍인들은 간디처럼 팻말만 들고 가서 "자, 때리십시오.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러나 싸우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냥 맞고 있어야겠군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의 압제자들은 '비폭력 투쟁'을 '피해자들이 나약한 증거'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서기 1949년 남아프리카의 정치단체였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영국 식민 당국과 아프리카너(영국인보다 2세기 먼저 남아프리카에 온 네덜란드계 백인들. 넬슨 만델라를 잡아가둔 국민당이라는 인종주의 정당도 이들이 만든 것이다)에게 맞서려고 "불매운동, 파업, 시민 불복종, 비협조"라는 비폭력적인 수단을 채택했습니다(이는 만델라가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보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죠).
서기 1952년 만델라는 이러한 노선에 바탕을 둔 "불복종 저항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불복종 저항 운동 기간 동안 모두 8,000명의 지원자들이 의도적으로 인종차별법을 위반하고 감옥에 들어갔"어요. 비록 그해 10월에 국민당 정부가 보낸 경찰이 모임에서 "발포"를 하여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인 투쟁 자체는 서기 1961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 국민당 정부가 '아,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생각하고 억압을 끝냈나요? 자신의 잘못을 직접 시인했습니까? 흑인 구역을 '점령'하는 짓을 끝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흑인에게 "어떤 집회에도 참석할 수 없"고 "3명 이상의 사람이 모이면 집회로 간주"해 잡아갈 수 있으며, "다른 금지령을 받은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금지령을 받은 사람의 말을 출판하거나 인용하는 것도 불법"인 '금지령'이라는 법을 만들었고, 실업자라는 이유로 "체포를 피할 수가 없는" 법을 만들며 "아프리카인이 백인 또는 인도인, 유색인(흑인과 백인, 또는 흑인과 바라트[:인도]인, 바라트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지정된 지역에 사는 것도 범죄"가 되는 법을 안겨 주었습니다.
"대규모 항의 집회에서 연설"을 하면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난입"을 해대고, "출근거부"와 "통행증 불태우기"라는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규모 일제검거"를 했단 말입니다.
더 큰 선물은? 서기 1960년에 주어졌죠. 국민당 정부는 흑인들의 비폭력 투쟁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ANC를 "금지"했습니다. 이게 '비폭력 투쟁이 가져다준 확실한 선물'이죠!
결국 비폭력 투쟁을 제안했던 넬슨 만델라도 이런 현실에 실망해 "우리의 해방 투쟁 조직들은 계속해서 비폭력 정책을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내란보다는 평화로운 변화를 원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참는 데도 한도가 있죠. 정부는 우리의 평화로운 투쟁을 우리가 약하기 때문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정부의 완력을 더 이상 비폭력적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한 것은..바로 정부입니다. 그들이 자초했습니다. 정부는 권리와 자유에 대한 평화로운 요구를 모두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움콘토 위 시즈웨('나라의 창'이라는 뜻. 줄여서 '움콘토'라고 부른다 - 옮긴이)' 가 우리의 최전방 방어선에 나설 것입니다."라고 선언한 뒤 무장투쟁으로 돌아섭니다.
움콘토는 서기 1961년 넬슨 만델라에 의해 조직되어 서기 1990년(드 클레르크 대통령이 넬슨 만델라를 풀어준 해)까지 무려 서른 해 동안 국민당 군대를 공격하고, 남아공의 발전소와 우체국에 폭탄을 던지면서 싸웠죠.
우스운 것은 비폭력 투쟁을 할 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세계 여론이 무장투쟁이 시작된 다음부터야 국민당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비폭력으로 '곱고 아름답고 부드럽게' 싸울 땐 뭐하고 있었나요?).
이것이 제가 '비폭력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비폭력 투쟁은 그것을 "나약하다"고 평가하지 않고 '투쟁"으로 받아들이는 상대한테만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근거 가운데 하나죠.
티베트는요? 달라이 라마가 60년대에 벌어졌던 티베트인들의 무장 투쟁을 금지하고 대신 '비폭력 탄원'이라는 방법으로 30여년 동안 구미, 일본, 중국 정부(!)에 독립을 요청했죠. 그리고 최근에는 독립도 '포기'하고 대신 '자치권만이라도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요청을 들은 가해자(중국정부)가 어떻게 했나요? '아, 내가 잘못했어.'라고 생각하고 물러나 줬습니까?
아뇨. 그들은 달라이 라마에게 내려진 현상수배령과 암살 명령을 취소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근에는 중국군에게 "달라이 라마를 겨냥한 테러 훈련"을 하라고 명령했죠. 이게 무조건적인 비폭력에 '응답'한 중국정부의 '수준'입니다. 간디의 방법이 어디에서건 통하는 건 아니라는 게 증명된 거죠.
이번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볼까요.
서기 1936년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자들과 영국에 맞서 "총파업"이라는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맞서 싸운 적이 있죠. 같은 해 "시리아에서 벌어진 대중 투쟁이 프랑스에게 양보를 강요한 것과 이집트에서 와프드당(민족주의 정당)이 거둔 비슷한 성공에 자극"받아, '파업을 통해서 압력을 넣으면 성공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벌인 투쟁이었습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시민 불복종, 납세 거부, 자치 정부 활동 중단 등의 강령에 합의"했죠. 그러자 "영국은 야파의 주요 구역을 파괴하고 연좌제를 적용하여 처벌하고 수많은 아랍인들을 재판 없이 구금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비교적 온건한 방법'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던 거죠.
상황은 쉰 여섯 해가 흐른 뒤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서기 1991년 조 사코라는 미국인 여행자의 보고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땅인 '실완'과 '나블루스'에서는 아랍인들이 총이나 돌, 화염병을 안 들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한 적이 있다네요.
실완은 원래 아랍인의 마을이었는데, 서기 1991년에 "유태인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 가족 몇몇을 내몰았"고 "그 땅을 점거하고, 철조망을 두른 뒤, 다윗의 별(시온주의자들의 깃발 - 옮긴이)을 내걸었"죠.
그걸 항의해서 "한 50명 정도"인 아랍인들이 '정착촌 반대! 협상 지지!'라고 쓰여진 팻말을 들고 "목청껏 구호를 외치며" "자기들의 생명을 걸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론은 그들에게는 전혀 주목을 안하더라고요.
나블루스에서 일어난 시위도 이야기해야겠네요. "기자, 교사, 회계사 등 열두 명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추방"된 사건을 따지는 시위대는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며, 차도 한가운데로 행진"했죠. 시온주의자들은 전경을 보내 "최루탄"을 쏘고, "몽둥이"로 시위대를 때리고, - 이미 익숙하시겠지만 - 시위자들을 "지프와 트럭"으로 몰고 가는 방식으로 시위를 탄압했습니다. 그 때 시위대가 영어로 "PLO 만세! 이스라엘 반대!"라고 외쳤더니 전경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목격자인 조 사코에 따르면 "웃긴다는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으면서 비웃고, 구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몽둥이로 때리며 잡아 넣었답니다.
한 팔레스타인 할머니가 전경들에게 "이 악당들아! 악당들아!"라고 외치니, 전경 가운데 하나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걸 이제 아셨수? 알았으면 꺼지쇼."라고 했어요.
이게 "명분"에 입각한 "비폭력 투쟁"이 불러온 '좋은 성과'입니까? 시위대의 시위가 시온주의자들에게 죄책감을 불러오지도 못했고, 길이 잠시 막힌 걸 빼고는 그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주지 않았으며, 요구사항은 전혀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는데요!
조 사코가 가자 지구의 누제이라트 난민촌에서 전해들은 사례도 말해보죠. 시온주의자들이 점령을 반대하는 시위에 끼어들었다고 의심해 붙잡은 아랍인 아이들은 "얻어맞고, 불이 붙은 조리 기구에 얼굴이 떠밀리"는 고문을 당합니다. 그럼 그렇게 당한 아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서한다'고 말하기를 기대했나요?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안 한 사람들에게 혐의를 씌워 고문했는데도?
여기까지 말한다면, "법으로 부드럽게 풀면 되잖아!"라고 하시겠죠. 그렇지만 법 자체가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여론도 시온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데도 그게 '법으로 온건하게 타결'될 거라고 믿는다면, 그런 생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네, 바로 이 때문에 저는 당신의 주장 - "명분"으로 싸워야 한다는 주장 - 에 찬성하지 않은 겁니다. 폭력시위가 벌어지고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와야 주목하는 이런 천박한 풍토가 바뀌지 않는 이상은, 피해자가 정당방위로 폭력투쟁을 해야 깜짝 놀라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압제자들이 있는 이상은, 억눌리는 이들의 폭력투쟁은 -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 지지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귀하가 "예전에 팔레스타인 소년이 이스라엘군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방영되면서 전세계의 여론이 팔레스타인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던 적이 있었"지만 얼마 후 "이 여론은 성난 팔레스타인 군중들이 이스라엘군인을 죽인 후 몇층인가 높이에서 시신을 던지고 회손하는 장면이 방영되며 그 효과가 반감되었던 적이 있"으니 자제하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성난 팔레스타인 군중들"이 시온주의자들을 죽여서 던지기 전에는 무얼 하셨는지 알고 싶네요.
만약 그때 팔장을 끼고 구경만 하셨다면 "팔레스타인 소년"의 죽음 때문에 분노한 "성난 팔레스타인 군중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만 분노하면 뭘합니까? 성금을 보내던지, 시온주의자들 앞에 가서 파란 별이 달린 깃발을 찢고 불태우던지, 아니면 우르르 몰려가서 시위를 하고 "점령을 끝내!"라는 압력이라도 넣었어야 하지 않나요? 그러지도 않고 말로만 "팔레스타인이 불쌍해"라고 말하고 끝냈다면, 당신도 상황을 나쁘게 하는 데 한 몫한 셈이란 말이죠(저는 그 때문에 반전시위에 꼭꼭 나가고, 성금을 내고, 주위 사람들에게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널리 알리면서 압력을 넣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을 끝내고 싶으시다면, 이 모든 일을 불러온 침략과 점령을 반대하고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안 할 수 있게 '대안'을 찾아주십시오. 그러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라, 부드럽게 굴어라."라고 설교한다면 이는 불에 기름을 붓는 셈이고 평화는 전혀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덧붙임 : 또 한가지만 말합시다. 돕지도 못하고 그냥 논평만 하는 "제 3자"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피해자가 그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합니까? 만약 도와준 자가 충고했다면 모르지만 자신이 맞고 있는데 그냥 팔장끼고 구경만 했거나 "그러면 안 돼. 싸움은 나쁜 거지."라고 말하면서 분노를 부추기면 그래도 참아야 하나요(더군다나 그 구경꾼은 때리는 자에게 세뇌되어 때리는 짓을 '교화'로, 맞는 자의 반격을 '폭력행위'로 모는데도?)? 저는 그래서라도 귀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음을 밝힙니다.
저는 이라크 독립군과 팔레스타인 독립군의 활동이 빈 라덴이나 알자르카위의 망나니짓 때문에 탄압받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그 두 놈을 쫓아내고 계속 싸우자는 거였지, 투쟁 자체를 하지 말자고 주장한 건 아니니 그것만은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이상입니다.
- '용서'는 맞은 사람이 스스로 판단해서 해야지, 때린 자나 구경꾼이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