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대결―오래 끈 싸움
흘러간 영화 속에서는 언제나 “선한 사람”이
악의 세력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자주,
악이 선을 이기는 것같이 보입니다.
끔찍한 악행 사건이 끊이지 않고
뉴스 방송과 신문에 보도됩니다.
미국 북부 지방에서, 밀워키 출신의
한 남자가 11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절단하여 냉동실에 넣어 둡니다.
미국 남부 지방에서, 웬 낯선 사람이
텍사스의 한 카페테리아에 차를 몰고
들이닥친 다음, 10분 동안 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그 자신을 포함하여 23명이 죽습니다.
한국에서 불특정 다수를 죽이는 살인
방화 사건이 여러차례 일어났습니다
이따금 터지는 이러한 악한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몸서리나는 악―민족 말살―도 있습니다.
금세기에만도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과
600만 명의 유대인, 100만 명을 웃도는
캄보디아인이 인종적, 정치적 정화
명목으로 떼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민족 정화가 구유고슬라비아에서
많은 사람을 강타하였습니다.
지구상에서 얼마나 많은 무죄한 사람이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최근에 터진 미군과 영국군이 민족차별 적인
잔인한 구타행위와 혐오스러운 고문 행위는
아랍계와 이슬람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집단 폭력적인 행위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비참한 사건들을 대하노라면 의당
‘왜 사람들은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가?’
라는 풀기 어려운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잔학 행위들을
정신 착란증에 걸린 몇몇 사람들이
저지른 일에 불과하다고 제쳐놓을 수 없습니다.
단지 금세기에 자행된 악행의 범위만 보더라도
그런 식으로 제쳐놓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행은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위로 정의됩니다.
악행은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저지른 행동입니다.
어쨌든 그 사람의 도덕적 판단이
비뚤어지게 되어 악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납니까?
악에 대한 종교적 설명은 흔히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가톨릭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께서 악이 존재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많은 선한 일들은 아예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많은 프로테스탄트 철학자들도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곳프리트 라이프니츠는
악을
“단지 세상에서 선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서
선이 많아지면 따라서 많아지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악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추리는 마치 암 환자에게 그의 병은
다른 사람들이 참으로 살아 있고 건강하다는 것을
느끼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악한 의도를 갖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에게 간접적인 책임이 있습니까?
성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악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에게 없다면,
누구에게 있습니까?
이어지는 구절들이 답을 알려 줍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느니라.]”
(야고보 1 : 13 - 15)
그러므로 악행은 악한 욕심을 물리치지 않고
기를 때 생깁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악한 욕심이 생기는 것은
사람에게 근본적인 결함인 유전받은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5 : 12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유전받은 죄 때문에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기심이 친절을 억누르고,
잔인성이 동정심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특정한 태도가
그릇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들의 양심―즉 바울이 일컬은
‘그 마음에 새긴 법’―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로마 2 : 15)
그런데 냉혹한 주위 환경이 그러한 마음을
억누를 수 있으며, 되풀이하여 무시할 경우
양심은 무감각해지고 맙니다.
디모데 전 4:2.
인간의 불완전성만으로 우리 시대의
조직적인 악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역사가 제프리 버튼 러셀은 이렇게 논평하였습니다.
“우리 각 사람 안에 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이 저지른 수많은 악행을 모두 합친다 해도
아우슈비츠를 설명할 수는 없다. ···
이런 규모의 악은 질적으로도
그리고 양적으로도 다른 것 같다.”
질적으로 다른 이런 악의 근원을
분명히 밝힌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얼마 전에,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자유 의사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
진리에 서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8 : 44)
예수께서 “이 세상 통치자”라고 하신
마귀는 분명히 악을 조장하는 면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다.
요한 16 : 11, 「새번역」; 요한 1서 5:19.
인간의 불완전성과 사단의 영향력으로 인해
수천 년 동안 엄청난 고통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옭아매고 있는 그러한 힘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아무런 조짐도 없습니다.
악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까?
아니면 결국에는 선의 세력이 악을 뿌리뽑을 것입니까?
그 해답은 성서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성서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악이 사라지는 때가 곧 올것임을
확신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흘러간 영화 속에서는 언제나 “선한 사람”이
악의 세력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자주,
악이 선을 이기는 것같이 보입니다.
끔찍한 악행 사건이 끊이지 않고
뉴스 방송과 신문에 보도됩니다.
미국 북부 지방에서, 밀워키 출신의
한 남자가 11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절단하여 냉동실에 넣어 둡니다.
미국 남부 지방에서, 웬 낯선 사람이
텍사스의 한 카페테리아에 차를 몰고
들이닥친 다음, 10분 동안 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그 자신을 포함하여 23명이 죽습니다.
한국에서 불특정 다수를 죽이는 살인
방화 사건이 여러차례 일어났습니다
이따금 터지는 이러한 악한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몸서리나는 악―민족 말살―도 있습니다.
금세기에만도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과
600만 명의 유대인, 100만 명을 웃도는
캄보디아인이 인종적, 정치적 정화
명목으로 떼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민족 정화가 구유고슬라비아에서
많은 사람을 강타하였습니다.
지구상에서 얼마나 많은 무죄한 사람이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최근에 터진 미군과 영국군이 민족차별 적인
잔인한 구타행위와 혐오스러운 고문 행위는
아랍계와 이슬람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집단 폭력적인 행위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비참한 사건들을 대하노라면 의당
‘왜 사람들은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가?’
라는 풀기 어려운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잔학 행위들을
정신 착란증에 걸린 몇몇 사람들이
저지른 일에 불과하다고 제쳐놓을 수 없습니다.
단지 금세기에 자행된 악행의 범위만 보더라도
그런 식으로 제쳐놓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행은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위로 정의됩니다.
악행은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저지른 행동입니다.
어쨌든 그 사람의 도덕적 판단이
비뚤어지게 되어 악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납니까?
악에 대한 종교적 설명은 흔히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가톨릭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께서 악이 존재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많은 선한 일들은 아예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많은 프로테스탄트 철학자들도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곳프리트 라이프니츠는
악을
“단지 세상에서 선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서
선이 많아지면 따라서 많아지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악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추리는 마치 암 환자에게 그의 병은
다른 사람들이 참으로 살아 있고 건강하다는 것을
느끼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악한 의도를 갖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에게 간접적인 책임이 있습니까?
성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악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에게 없다면,
누구에게 있습니까?
이어지는 구절들이 답을 알려 줍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느니라.]”
(야고보 1 : 13 - 15)
그러므로 악행은 악한 욕심을 물리치지 않고
기를 때 생깁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악한 욕심이 생기는 것은
사람에게 근본적인 결함인 유전받은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5 : 12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유전받은 죄 때문에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기심이 친절을 억누르고,
잔인성이 동정심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특정한 태도가
그릇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들의 양심―즉 바울이 일컬은
‘그 마음에 새긴 법’―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로마 2 : 15)
그런데 냉혹한 주위 환경이 그러한 마음을
억누를 수 있으며, 되풀이하여 무시할 경우
양심은 무감각해지고 맙니다.
디모데 전 4:2.
인간의 불완전성만으로 우리 시대의
조직적인 악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역사가 제프리 버튼 러셀은 이렇게 논평하였습니다.
“우리 각 사람 안에 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이 저지른 수많은 악행을 모두 합친다 해도
아우슈비츠를 설명할 수는 없다. ···
이런 규모의 악은 질적으로도
그리고 양적으로도 다른 것 같다.”
질적으로 다른 이런 악의 근원을
분명히 밝힌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얼마 전에,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자유 의사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
진리에 서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8 : 44)
예수께서 “이 세상 통치자”라고 하신
마귀는 분명히 악을 조장하는 면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다.
요한 16 : 11, 「새번역」; 요한 1서 5:19.
인간의 불완전성과 사단의 영향력으로 인해
수천 년 동안 엄청난 고통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옭아매고 있는 그러한 힘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아무런 조짐도 없습니다.
악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입니까?
아니면 결국에는 선의 세력이 악을 뿌리뽑을 것입니까?
그 해답은 성서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성서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악이 사라지는 때가 곧 올것임을
확신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