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고구려는 한민족의 역사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왠지 고구려인들은 지금의 조선(북한), 한국 사람들과 뭔가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말이나 음식, 옷 등은 그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서 가야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들과 어떤 공통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오히려 고구려 사람들은 만주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말도 비슷하고 먹는 것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저야 전문 연구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말부터 많이 달랐을 겁니다. 그 흔적을 저는 지금도 보니깐요.
저의 고향은 부산입니다. 서울 생활을 한지는 채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졌는데 처음에는 서울 출신 사람들이 저의 말을 못 알아 듣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물론 저야 거의 다 알아 들었습니다. 테레비 덕분이었죠.) 저 또한 그들이 왜 못 알아듣는 지도 몰랐습니다. 제가 쓰는 단어들이 서울 출신 사람들은 쓰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거죠.
학교에서부터 똑같은 말을 배우고, 테레비와 라디오를 통해 서울 중심의 말을 계속해서 듣고 배우는데도 통하지 않는 말들이 있는데 시간을 1천 몇 백년 뒤로 돌려 보면 어떨까요? 가야 사람들과 고구려 사람들이 만나서 얘기를 나눈다면 정말 말이 통했을까요? 정말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을까요? 평생 가도 얼굴 한번 마주칠 일도 없는 그들은 서로를 정말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저의 추측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같은 민족이라고 별로 생각하지 않았을 거구요, 다만 뒤에 그들을 지배한 세력들이 자신의 정당성과 정체성을 위해 같은 민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그렇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2. 일제 식민지와 베트남 침략
광복절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축구 시합이나 교과서나 테레비를 통해서나 역사의식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침략했고, 수 십 년 동안 점령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강간하고 때렸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겪지 않은 일인데도 말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한국군이 미국과 침략 동맹을 맺고 베트남을 침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강간하고 때렸다는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 시대를 겪었으면서도 말입니다.
한국인들이 일제 식민지 시절과 베트남 침략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실을 두고 일본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죽이고 강간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똑같은 사실을 두고 베트남 사람들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베트남 전쟁을 통해 이룩한 한국의 경제성장(국익)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사실은 하나인데 기억은 여러 개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3. 이라크 침략
2003년 초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던 것처럼 우리의 기억은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2003년이 아니라 1991년입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했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이라크를 역 침략 했습니다. 그리고 이라크 정권의 일부 항복을 받아 내고서도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략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를 계속해서 아무 이유도 없이 폭격을 했고, UN의 껍질을 쓰고 의약품마저 수입을 하지 못하게 해서 50만 명이 넘는 어린이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기억속에는 어떤 것들이 남아 있습니까?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했다’ -> ‘미국이 응징했다’ -> ‘그리고 전쟁은 끝났다’ -> ‘2003년이 되어 다시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럼 그 사이에 있었던 10여년은 어디로 갔습니까? 한국인들이 그리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던 10여 년 동안 이라크인들도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었을까요? 그들도 우리처럼 10여년의 기억을 잃어 버렸을까요?
누구의 기억이 사실입니까? 왜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누군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4. 기억
우리는 권력과 자본, 교육과 언론이 기억하라는 것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군인 출신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는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우리를 지켰던 위대한 장군들이 이 나라를 지켜 왔다고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학자 출신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 민족의 문화와 학문 발전에 큰 기여를 했던 위대한 학자들이 이 나라를 발전시켜 왔다고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에서부터 거짓과 권력과 자본에 대한 저항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생각하고 ‘사실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정말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조작된 것인지를 가려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진실이라고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진실을 진실로 밝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진실을 끄집어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입력된 정보에 따라 움직이는 로보트가 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