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살아오면서 '자기얼굴에 책임지고 살아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님의 삶을 살아보지 않아서 님을 '잘 이해합니다'라는 오만한 말은 할 수 없습니다. 대신, 글을 통해서 본 님의 일면은 '참 고집이 있으신 분이구나'하고 짐작할 뿐입니다.
외길 인생을 걸었거나 자수성가한 사람에게 특히 많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내가 이만한 고집이라도 있어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누가 지적을 해도, 남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더군요. 특히, 고집에서 비롯된 잘못된 일을 지적했을 땐,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고집이 꺽이면 마치 자기 존재도 없어지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삶의 자리에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 인생 전체를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매도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도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불완전한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자기 잘못을 성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일 것입니다.
저는 님을 통해서 제 아버지를 봅니다. 그리고 제 삶을 되돌아봅니다.
제 아버지는 결혼을 하기 전까지 타인과 관계를 잘 맺는 방식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없었던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꾸려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조율해 나갈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정치를 학습해야 하는 이유일텐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곧잘 갈등을 고집이나 폭력으로 무마하려고 했고, 그 속에서 자식인 저와 엄마는 집안을 시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방적인 양보속에 성립된 가부장제 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부장제는 그 자체로 폭력을 내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어릴 때는 이런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냥 저런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아버지를 적으로 간주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라는 감정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맞기도 많이 맞았고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습니다. 그러나 부글부글 끊는 감정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아버지는 저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에 대해 분노하는만큼 나는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 아버지처럼 행동한 적은 없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어떤 존재'가 저에겐 형이었습니다. 제 형은 정신지체를 가진 장애인입니다. 제 형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상의 참담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저 또한 '장애인과 어떻게 관계를 잘 맺을 것인가? 장애인의 언어와 시선과 감수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제대로 된 인권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는 비장애인이기 때문에 형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내 식으로 잘한다고 한 것이 형에겐 상처가 될 때가 있고, 고의적이지 않더라도 형에겐 불쾌감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제 인격이 딱히 나빠서가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정상적인 삶이라고 교육받고, 세월을 통해 체화된 사회적 배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로 제가 할 수 있는 잘못까지 알리바이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에게 상처를 준 날, 저는 잠을 잘 못 잡니다. 수면제를 먹는 날도 있습니다. 어떤 날은 제 인생도 불쌍하고 억울할 때도 솔직히 있습니다. 그러면 웁니다..
하지만 그 어울함이 형의 삶에 비견할 만한 것은 아니기에, 그저 내 삶의 몫으로 감당해야할 부분은 감당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형과 관계를 잘 맺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살아 평생 고민해 나가야 할 부분이라해도, 적어도 어제 한 실수는 하지 말자고 반성합니다. 그런 시행착오속에서 저는 성장했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장애인 단체에서 좀 더 엄격한 기준의 인권적 잣대를 제게 들이대면 저도 사람인 이상 감정적으로야 억울한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형이 겪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도 겪게 될 상처를 생각하면 제가 감당할 몫은 감당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것을 제 존재를 위협하는 '위기'로 받아들일 때, 제가 살 희망은 없거던요.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받아들이고, 한층 성숙된 존재로 부단히 스스로 노력하고 사회를 바꾸어 가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장애인 단체에 속한 사람들도 이 기회를 통해서 혹시 과정상에서 있을 지도 모를 시행착오를 성찰할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차원 이전에 자신의 존립근거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고양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 단체의 장애인을 두고 '나도 반성할테니, 너희도 각성해라'라고 말 할 순 없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주제넘은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늘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의 스피커가 크고, 과잉대표되는 상황을 염두해 둔다면, 장애인들이 논의해서 결정할 부분을 제가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쪽에서 정리할 부분은 놓아두고, 제가 정리할 부분은 정리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제 삶을 위해서도 옳은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부글부글 끊는 속내를 감출 길이 없어서 감정적인 말들로 게시판을 어지럽히는 행동은 문제해결에 방해가 될 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님은 경찰서에 팔레스타인평화연대를 고소했고, 그것을 근거로 협박하고 있습니다. 좀 힘드시겠지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고소를 취하하시고, 님께서 이행하겠다고 한 요구사항을 이행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공부가 짧아서 우리사회에 진정한 시민사회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합리적인 소통의 공간을 확보함을 의미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감정이 너무 앞서고 수세에 몰렸다는 자괴감때문에 공권력을 통한 문제제기를 하신 모양입니다. 옳다고 생각치는 않지만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은 가집니다.
서로 견해가 다른 부분은 정연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가는 것이
애시당초 시민단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된 님의 동기와도 맞지 않겠습니까?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 자신을 위해서도 이 방법이 합당하다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님을 만나거나 통화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대인공포증이 있습니다. 그것은 님이 어떤 분이어서 그런게 아니라 낯선 만남에 대해 불편함을 넘어선 어떤 숨막힘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적 장애를 가지게 된 것도 기질적 소인도 있겠지만 학교에서 생긴 어떤 폭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폭력'이나 '박멸' 이런 용어 자체에도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이런 글을 쓴다고 '거룩한 주관'을 가졌다고 생각하거나 '진보적'이라고 착각할 만큼 뻔뻔함이 없습니다. 그 누가 어떤 평가를 내리든, 제가 제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고, 자기가 자기에게 짓는 독만큼은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디, 저나 글 자체를 보지 마시고, 제가 이 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여성은 다 장애인(병신)' 이런 악의적인 오독이 두려워서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 누구도 님의 삶을 코너에 몰고 온갖 나쁜 이미지를 대체하고, 님을 뺀 나머지 자기 삶은 건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성숙한 판단을 내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하는 길입니다. 계속해서 인격을 실추시키고 있는 행위부터 중단해 주십시오.
문득문득 이 지긋지긋한 삶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쨋든 삶을 견뎌야 한다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은 제가 감히 말씀드립니다.
외길 인생을 걸었거나 자수성가한 사람에게 특히 많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내가 이만한 고집이라도 있어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누가 지적을 해도, 남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더군요. 특히, 고집에서 비롯된 잘못된 일을 지적했을 땐,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고집이 꺽이면 마치 자기 존재도 없어지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느 삶의 자리에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 인생 전체를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매도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도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불완전한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자기 잘못을 성찰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일 것입니다.
저는 님을 통해서 제 아버지를 봅니다. 그리고 제 삶을 되돌아봅니다.
제 아버지는 결혼을 하기 전까지 타인과 관계를 잘 맺는 방식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없었던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꾸려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조율해 나갈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정치를 학습해야 하는 이유일텐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곧잘 갈등을 고집이나 폭력으로 무마하려고 했고, 그 속에서 자식인 저와 엄마는 집안을 시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방적인 양보속에 성립된 가부장제 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부장제는 그 자체로 폭력을 내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어릴 때는 이런 이해가 없었습니다. 그냥 저런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아버지를 적으로 간주하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라는 감정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맞기도 많이 맞았고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습니다. 그러나 부글부글 끊는 감정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아버지는 저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에 대해 분노하는만큼 나는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 아버지처럼 행동한 적은 없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어떤 존재'가 저에겐 형이었습니다. 제 형은 정신지체를 가진 장애인입니다. 제 형이 장애인이기 때문에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상의 참담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저 또한 '장애인과 어떻게 관계를 잘 맺을 것인가? 장애인의 언어와 시선과 감수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제대로 된 인권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는 비장애인이기 때문에 형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내 식으로 잘한다고 한 것이 형에겐 상처가 될 때가 있고, 고의적이지 않더라도 형에겐 불쾌감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제 인격이 딱히 나빠서가 아니라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정상적인 삶이라고 교육받고, 세월을 통해 체화된 사회적 배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로 제가 할 수 있는 잘못까지 알리바이로 삼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에게 상처를 준 날, 저는 잠을 잘 못 잡니다. 수면제를 먹는 날도 있습니다. 어떤 날은 제 인생도 불쌍하고 억울할 때도 솔직히 있습니다. 그러면 웁니다..
하지만 그 어울함이 형의 삶에 비견할 만한 것은 아니기에, 그저 내 삶의 몫으로 감당해야할 부분은 감당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형과 관계를 잘 맺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살아 평생 고민해 나가야 할 부분이라해도, 적어도 어제 한 실수는 하지 말자고 반성합니다. 그런 시행착오속에서 저는 성장했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장애인 단체에서 좀 더 엄격한 기준의 인권적 잣대를 제게 들이대면 저도 사람인 이상 감정적으로야 억울한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형이 겪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도 겪게 될 상처를 생각하면 제가 감당할 몫은 감당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것을 제 존재를 위협하는 '위기'로 받아들일 때, 제가 살 희망은 없거던요.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받아들이고, 한층 성숙된 존재로 부단히 스스로 노력하고 사회를 바꾸어 가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장애인 단체에 속한 사람들도 이 기회를 통해서 혹시 과정상에서 있을 지도 모를 시행착오를 성찰할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차원 이전에 자신의 존립근거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고양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 단체의 장애인을 두고 '나도 반성할테니, 너희도 각성해라'라고 말 할 순 없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주제넘은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늘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의 스피커가 크고, 과잉대표되는 상황을 염두해 둔다면, 장애인들이 논의해서 결정할 부분을 제가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쪽에서 정리할 부분은 놓아두고, 제가 정리할 부분은 정리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제 삶을 위해서도 옳은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부글부글 끊는 속내를 감출 길이 없어서 감정적인 말들로 게시판을 어지럽히는 행동은 문제해결에 방해가 될 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님은 경찰서에 팔레스타인평화연대를 고소했고, 그것을 근거로 협박하고 있습니다. 좀 힘드시겠지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고소를 취하하시고, 님께서 이행하겠다고 한 요구사항을 이행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공부가 짧아서 우리사회에 진정한 시민사회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합리적인 소통의 공간을 확보함을 의미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감정이 너무 앞서고 수세에 몰렸다는 자괴감때문에 공권력을 통한 문제제기를 하신 모양입니다. 옳다고 생각치는 않지만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은 가집니다.
서로 견해가 다른 부분은 정연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대화를 통해서 해결해가는 것이
애시당초 시민단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된 님의 동기와도 맞지 않겠습니까?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 자신을 위해서도 이 방법이 합당하다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님을 만나거나 통화하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대인공포증이 있습니다. 그것은 님이 어떤 분이어서 그런게 아니라 낯선 만남에 대해 불편함을 넘어선 어떤 숨막힘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적 장애를 가지게 된 것도 기질적 소인도 있겠지만 학교에서 생긴 어떤 폭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폭력'이나 '박멸' 이런 용어 자체에도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이런 글을 쓴다고 '거룩한 주관'을 가졌다고 생각하거나 '진보적'이라고 착각할 만큼 뻔뻔함이 없습니다. 그 누가 어떤 평가를 내리든, 제가 제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고, 자기가 자기에게 짓는 독만큼은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디, 저나 글 자체를 보지 마시고, 제가 이 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여성은 다 장애인(병신)' 이런 악의적인 오독이 두려워서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 누구도 님의 삶을 코너에 몰고 온갖 나쁜 이미지를 대체하고, 님을 뺀 나머지 자기 삶은 건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성숙한 판단을 내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하는 길입니다. 계속해서 인격을 실추시키고 있는 행위부터 중단해 주십시오.
문득문득 이 지긋지긋한 삶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쨋든 삶을 견뎌야 한다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은 제가 감히 말씀드립니다.
김영한
오히려 아내나 여자 친구한테 맨날 꼬집히며 살아가는 여리디 여린 남자죠..
제 얼굴을 한번 보시라니 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