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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팔레스타인의 종교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개관 :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 비잔틴 문명 그리고 칼리프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기 1세기경, 팔레스타인 땅에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이들은 대체로 유대인들과 그리스어를 쓰는 ‘이방인’들이었다. 예루살렘 정교회의 계보에 따르면 예루살렘 최초의 주교(감독)는 예수의 제자이자 형제로 일컬어졌던 야고보(?~62?, 69?)라고 한다. 물론 당시에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한 종파였고 체계화된 교리와 성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박해 속에서도 다소 유연하고 자유로운 학문적 경향을 유지 할 수 있게 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세계 종교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리스 문화에 익숙했던 유대인 개종자 사도 바울로의 등장 이후부터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에 참여했던 이들은 하층계급, 여성, 지식인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자들이 (다소 어렴풋하기는 했으나) 설파했던 예수의 인류애적 가르침과 평등한 구원의 교의에 이끌렸다. 당시의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 시리아인, 그리스인 (그리고 나중에는 아랍인)등 다양한 민족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초기 그리스도교는 통일된 체계는 없었지만 강한 하층 계급 기반성과 동시에 (동, 서 문화 융합 이후의) 그리스 철학과 문화가 맞물려 있던 세계이기도 했다. 인도 철학, 신플라톤주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그노시스주의, 유대 철학 심지어 중국의 도가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과 문화가 소아시아 지방과 지중해 연안에 퍼져있어 당시 그리스도교는 학문적으로 개방적인 성향을 띄었으며 신비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지배계급에 의해 공인되면서 끊임없는 탄압에 의해 소멸직전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샴 지방(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면서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종교인 그리스 정교회의 신비신학에 침투하여 영향을 주게 된다.

 팔레스타인이 비잔틴 문화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면서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도들은 대체로 그리스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애초에 이들은 동방 그리스도교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드물게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였다. 때문에 시리아의 단성론파 그리스도교도들로부터 ‘멜키트’(왕당파)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는데, 오늘날 이 멜키트라는 명칭은 그리스 정교회의 전통과 신학을 유지하되 바티칸 교황의 수위권을 받아들인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교황 수위권에 대한 입장과 바티칸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이들은 서로 차이가 없다. 오늘날에도 대다수의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 정교회와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으며 자신들을 아랍 그리스도교로 여기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이 아랍/이슬람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 급격하게 이슬람화가 이루어진 것은 2대 칼리프인 우마르 때였다. 그는 638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리스 정교회 주교로부터 성묘 교회의 열쇠를 받았다. 문화적 포용성과 강력한 응집력을 바탕으로 했던 이 신종교는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이슬람의 성립과 배경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세계를 자힐리야(무명 시대)라고 부른다. 당시 샴 지방 이남의 아라비아 반도는 다신교와 부족 중심의 혈연주의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아라비아 사막에서 인간생활의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부족이었다. 자힐리야 시대, 베두인들의 역사는 부족간의 반목과 복수의 연속이었다. 부족 내부에서는 끈끈한 애정과 유대감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부족의 경계에 한해서였다. 부족 내에서의 가족애와 다른 부족에 대한 가차없는 복수는 당시 문헌에서는 ‘남자다운’ 미덕으로 칭송되었다. 서로 다른 부족 간의 결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풀네임은 아부 알 카심 무함마드 빈 아브드 알라 빈 아브드 알 무탈리브 빈 하심(Abū al-Qāsim Muḥammad ibn ʿAbd Allāh ibn ʿAbd al-Muṭṭalib ibn Hāshim)이다. 그의 긴 이름이 말하듯이, (그 이후에도 그렇게 되긴 했지만) 당시 아라비아 사회에서 부계상의 혈통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했다.

그런 맥락에서 자신이 속해있던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 가 귀족들이 내세운 도덕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과 전혀 혈통적인 연관이 없는 이들에 대한 유대와 사해 동포주의를 외치고 다녔던 그의 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 새로운 일신교에 참여한 이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빈곤계급과 노예를 포함한 하층민들이었다. 처음에는 부유층과 쿠라이시족 원로들도 별다른 적의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수가 점차 증가하고 분명한 셈적 일신교 체계를 갖추게 되자 경계하기 시작했다. 사실 ‘유대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 아닌’ 일신교 운동은 그 이전에도 사회적, 종교적 차원의 운동으로 존재해 왔었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에도 유대교와 동방 그리스도교 일파(특히 네스토리안)가 퍼져있었고 무함마드를 비롯한 다른 종교적 지식인들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이들을 ‘하니프’라고 불렀다.(이 단어의 어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순수한 일신교 운동이었는데, 특히 무함마드는 순수 일신교가 역사적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단계를 거치면서 그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어왔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가 ‘영원한 종교’의 이상적 인간으로 본 사람은 아브라함이었다. 이슬람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아니었고 그리스도교도 아닌 진정으로 하느님을 따른 사람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아니었고 그리스도교도도 아니었노라. 그는 순수한 신앙의 사람, 완전한 귀의자였으며, 신과 사신을 혼동하는 무리 가운데 끼이지 아니하였노라.

 분명코 아브라함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따른 자들로서, 이 예언자와 그를 믿는 자들이니, 신께서는 믿는 자들의 벗이니라.

제3장 60~61절

 

 

무함마드가 품고 있었던 ‘영원한 종교’의 이상은 바로 아브라함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을 최초의 무슬림으로 여기고 있다.

 

 

비잔틴과 이슬람, 그리고 유대 문화의 조우

 비잔틴의 문화적 유산은 양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특히 서구 사가들에 의해 그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는 한층 강화되었다. 비잔틴의 궁정은 음모와 암살로 끊이지 않았다. 비잔틴 제국의 1백여 명의 황제 가운데 3분의 1이 비명횡사를 하였는데, 눈에 찔려 죽은 자가 아홉, 독살된 자가 넷, 참수당한 자가 넷, 칼에 찔려 죽은 자가 셋, 교살된 자가 둘, 사지가 잘린 자가 둘, 생매장당한 자, 아사당한 자, 능지처참당한 자, 박살형을 당한 자가 각기 하나 씩이라고 한다. 서구의 사가들이 비잔틴을 묘사할 때 쓰는 피와 음모와 같은 어두운 수식어를 쓰게 된 것은 제국의 이면에 항상 존재했던 이러한 권력투쟁과 혼란스러웠던 정국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비잔틴의 궁정은 항상 음모와 피바람으로 가득했으며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강한 전제 군주제와 관료제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지속적인 팽창과 정복은 때로 타민족에 대한 가혹한 통치의 형태를 띄기도 했다.

 한편으로 비잔틴인들은 (세속문화를 포함한) 그리스 문화와 예술을 보존하는데 주력했으며 학자와 예술가들은 다양한 문화 경험과 철학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학문체계와 예술을 창조해 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은 비단길을 잇는 교역통로여서 동방의 문물을 서구에 전파하는 역할도 담당하여 중세 유럽의 상업 부흥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잔틴은 전제적 통치와 팽창만이 아닌 문화적인 포용성을 보였던 것이다. 

비잔틴과 아랍/이슬람은 군사적으로는 끊임없이 부딪혔지만 문화적 교류는 활발했다. 아랍인들이 찬탄해 마지않아했던 문명이 바로 비잔틴이었고, 비잔틴인들은 아랍/이슬람을 선진적 문명을 지닌 이들로 예우했다. 아랍인들이 주변 적대 국가 중에 유일하게 문화인들로 지칭했던 이들이 바로 비잔틴 인들이었다. 비잔틴의 한 여제는 사라센 출신의 장군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아랍 학자들이 비잔틴 문화를 존중했던 이유 중 하나는 비잔틴 문명이 서구 세계와는 달리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철학 그리고 헬레니즘 시기 이후의 그리스 철학, 예술을 비잔틴 문화와 조화시켜오면서 보존해왔기 때문인데, 아랍 학자들이 번역한 그리스 학문서들은 십자군 전쟁 이후에 서구 세계에 전해져 르네상스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의 샴 지역의 문화는 지배적 이슬람 문화와 비잔틴이 공존해 온 역사이기도 했다. 638년 2대 칼리프 우마르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당시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소프로니우스(동방 교회 축일 3월 11일)은 칼리프가 기도할 수 있도록 성묘 교회에 초대했다. 그러나 우마르는 ‘그리스도교도들의 성전에서 무슬림 지도자인 내가 가게 되면 다른 무슬림들이 무분별하게 난입하여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칼리프의 지혜에 탄복한 소프로니우스 주교는 성묘 교회의 열쇠 2개를 칼리프에게 주었다. 우마르는 이 두 열쇠를 믿을 만한 무슬림들에게 보관하게 했는데, 그 이후로 현재까지 성묘 교회의 열쇠는 무슬림들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예루살렘, 혹은 알 쿠즈의 의미

예루살렘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전통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교도들에게 있어 그곳은 <다윗왕의 도시>이며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은 그 자리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야훼 성전을 건축했다. 그 이후로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는데, 바빌론 유배 이후에는 재건과 파괴의 역사의 상징으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한편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예수가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고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이른 장소이다.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하여 신의 계시를 받은 곳이다. 쿠란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꿈을 꾸었는데 가브리엘 천사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승천하여 신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 후대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고 전해지는 자리의 바위위에 “바위돔 모스크”가 세워졌다.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차이

 사실 교리적인 차원에서는(교황 수위권과 같은) 정교회와 가톨릭이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황제에 의해 공인된 이후 서로마에는 로마 가톨릭이 동로마(비잔틴)에는 동방 정교회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까도 언급했듯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샴 지방과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져있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철학 담론은 그리스도교의 국가 공인에 이은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승려들과 학자들을 통해 살아남아 그리스 정교회의 신비 신학에 스며들었다. 때문에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프로테스탄트는 신학적인 차원에서 커다란 차이가 나타난다. 로마 가톨릭의 신학이 체계적, 논리적, 교의적이라면 동방 정교회의 신학은 신비적, 정적, 철학적이라는 관념은 이 때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신학적인 차원에서 몇 가지 중요한 차이를 들어보자 :


1. 동방 정교회에는 원죄(Original Sin)교리가 없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서는 태초에 첫 인간들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 야훼를 거역한 죄가 인류에게 대대로 유전되어 오늘날의 인류에게 원죄가 남아있어서 인간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쳐왔다. 반면, 그리스 정교회를 비롯한 동방 그리스도교에서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교리가 나온 적은 없다. 대신 ‘메타노이아’라는 신학상의 개념은 있는데, 이는 ‘회심’ 즉 마음의 상태를 바꾸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대속’이 아닌 신과 인간의 화해이며 하나됨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과 부활은 과거의 1회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내면을 통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부정신학

로마 가톨릭을 비롯한 서방 교회에서는 신에 대하여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신을 논증하는 긍정신학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이 때문에 서구 세계에서는 수사학이 발달했다. 반면에 부정신학은 신을 논리적인 차원에서 논하고 인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는 신을 존재와 비존재의 차원에서조차 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그레고리오 팔라마스) 사실상 신은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정신학의 전통에서 동방 그리스도교에서는 명상 수행과 신비 신학이 발달했다.

 

 *헤시카즘

 동방 정교회 내 명상 수행가, 신비주의 철학자들을 ‘헤시카스트’라고 불렀다. 이들에 따르면 불가해한 신을 체험하고 하나에 이르는 길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내면의 도, 즉 신성(하느님의 모상)을 획득함에 달려있다고 한다. 이 ‘헤시카즘’은 후대에 제도권 교회와 서방 사가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식 요가’(물론 비꼬는 의미에서), ‘옴팔로프시코스’(배꼽에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헤시카즘 수행자들이 시선을 배 위 심장 부분에 고정시켰던 것을 비꼬아 말한 것)로 알려졌다. 하지만 헤시카즘은 교회의 우려에도 아랑곳 않고 동방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헤시카즘은 권력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인간 내면의 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슬람의 수피즘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수피즘은 이를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실천해 나갔다.


십자군 전쟁 – 탐욕과 재앙, 그리고 각성

 -십자군 전쟁은 상인들과 정치인들, 성직자의 탐욕과 민중들의 맹목적인 종교적 열정이 어우러진 비극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 아랍 무슬림들과 투르크 인들은 그리스도교도들에 대한 반감을 사게 되고 비잔틴 제국은 십자군의 약탈로 문화적 창조성마저 잃고 점점 약해져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한다. 하지만 십자군들 중 극소수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아랍인들을 실제로 접하고 그들이 짐승과 같은 야만인들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 나갈 수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서구 세계에서 난무하던 잘못된 정보들 -이슬람은 다신교이고 무함마드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적그리스도라는 주장과 같은- 을 수정했다. 또한 이들은 아랍 무슬림 학자들을 통해 새로운 학문의 세계와 그리스 철학을 접했다. 이 시기에 서구 출신의 그리스도교도들과 이슬람 신학자들이 신학과 철학에 대하여 토론하는 광경을 교육기관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라틴 전례를 따르는 로마 가톨릭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에 등장한 것도 이 때이다.


 “하느님은 서방을 동방에 주입하셨다. 서방인인 우리는 지금 동방인이다. 로마인이나 프랑크인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갈릴레아인이 되거나 팔레스타인인이 되었다. 렝스나 사르트르에서 온 사람이 이는 타르인이거나 안티오키아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고향 땅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고향 땅은 우리에게 낯선 땅이 되고 말았다.”

 -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한 한 십자군 병사의 수기 中


아랍-이슬람 세계의 확장과 ‘아랍’ 개념의 변화

 이슬람은 비록 특정 민족에 국한시키지 않는 보편주의를 내새웠지만 이후 이슬람 국가가 팽창하면서부터 사회적, 정치적으로 아랍인들이 우세한 위치를 점했다. 또한 신의 말씀인 쿠란이 아랍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은 지배계층 아랍인들의 상징적 우위를 뒷받침했다.

 한편, 비아랍계 무슬림들과 뒤늦게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랍인들을 ‘마왈리’(종속민)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의 불만은 매우 컸다. 당시 문헌에는 이들의 사회적 열등감이 자주 묘사되었다. 그러던 중 이슬람 세계가 우마이야 조에서 압바시야 조로 넘어가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당시의 반란에는 상당수의 비아랍 무슬림, 이란인들과 호라산인들이 참여했고 상당수 시아파 무슬림들도 이에 동조했다. 또 식자층 사이에서는 비아랍 무슬림들과 아랍 무슬림들이 평등하다고 하는 ‘슈우비아’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페르시아 어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2대 칼리프 만수르 때에는 국제도시였던 바그다드(하늘이 준 곳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로 천도함으로써 아랍/이슬람 사회는 바야흐로 다민족 사회로 변모하게 된다. 또 동시에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도 커졌다. ‘아랍’이라는 개념이 바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때까지 아랍이라는 단어는 혈통적 의미의 종족을 의미했다. 하지만 압바시야 조 때 사실상 마왈리들에 대한 차별이 철폐되면서 무슬림이 아랍어를 구사하면 아랍인으로 인식되었다. 이때 아랍화된 이들은 이라크인, 시리아인, 이집트인, 상당수 그리스도교도 등을 포함했다. 오늘날처럼 ‘아랍’을 샴 지방을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 전체와 북아프리카 세계로 인식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서

- 저는 종교에 두 가지 층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도그마(교리, 교의, 제도)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적, 자율적 차원입니다. 만약 전자에만 초점을 맞추어 종교를 바라본다면 종교는 그 자체로 답이 없습니다. 이슬람은 그 자체로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일 뿐이거나 종파간 갈등(으로 보이는 사회문제들)은 치유 불가능하겠지요.(실제로 현 종교 비판 담론에는 이러한 성향이 자주 보입니다) 역사적으로, 종교에 있어 전자의 차원은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사회의 모순을 가리거나 노골적으로 지배계급에 복무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모든 종교적 텍스트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반면, 후자의 차원에서 종교를 바라본다면 종교는 그 자체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닙니다. 역사적으로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종교 세계를 탐구하고자 했던 이들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위에 언급한 동방 정교회의 헤시카즘과 이슬람의 신비주의 철학인 수피즘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신비주의적 전통이 중산층이나 지배계층의 개인주의적 욕망과 맞물리면 도피적이거나 파괴적인 성향으로 변질되고 왜곡되지만 그것이 사회의 억압받는 이들, 즉 피지배 계급과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정신과 맞물리면 혁명적이고 저항적인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두호보르파나 중세 프랑스의 알비파, 조선 말의 동학운동이 그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성공하지 못했지만, 권력과 강제가 아닌 인류애와 형제애가 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그 이후에도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저는 팔레스타인 땅에 뿌리를 내렸던 이 두 종교에 중점을 두고 신비주의 전통과 문화의 기원을 추적해 보고자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란 국내에서 통용되는 신비주의와 다소 다른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어떤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것만을 칭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이 종교의 역사는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던 황제와 고위 성직자들만의 것이 아닌, 수많은 구도자, 승려, 여성, 농민들이 일구어낸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어떤 환상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미움, 전통에 기반한 편견, 미신도 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와 역사를 움직여왔던 것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권력 지향적이었던 (남성) 황제와 고위 성직자들 중심이 아닌 무명의 구도자와 승려, 여성, 농민에 기반한 새로운 종교사가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좀 두서없이 준비했습니다.. 워낙 그 범위가 다양한 테마이다 보니 정리가 더 길어졌네요..  부족하지만 이 텍스트를 보는 분들(종교적인 분들, 비종교적인 분들, 신앙을 새로이 찾는 분들, 종교에 비판적인 분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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