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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자살폭탄테러'에 대해서

by 다다 posted Jun 0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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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팔레스타인=자살폭탄테러?

팔레스타인이란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단어들은 뭘까. 하마스, 아라파트, 가자 지구, 미사일 폭격, 무장단체, 평화협상?...아마도 이중 단연 최고는 ‘자살폭탄테러’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허리에 폭탄 벨트를 두르고 이스라엘의 군 검문소나 대형 쇼핑몰, 버스정류장, 카페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무자비한 청년의 모습.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머릿속에 가장 깊이 각인된 팔레스타인의 이미지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자살폭탄테러’라는 지극히 자극적인 용어의 광범위한 유포, 그리고 소위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나야만 호들갑을 떨며 주요 뉴스로 보도하는 국내외 언론의 탓이 크다.

2. 자살, 폭탄, 테러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극악한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를 부당하게 덧씌우고 있는 ‘자살폭탄테러’라는 용어에 대해 살펴보자. ‘자살폭탄공격’을 감행하면 공격의 행사자는 거의 백퍼센트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죽음은 애초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한 목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격의 결과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변변한 무기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점령 치하의 사람들이 핵무기를 비롯한 최첨단 군사력을 지닌 점령국에 저항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애초부터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물론 비폭력 저항과 비폭력 직접 행동의 방식은 일단 예외로 하고 말이다.

일부 언론과 친이스라엘적 연구집단에서는 ‘자살공격’과 이슬람을 부단히 연결 지으며 이슬람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려 하나본데 이슬람의 가르침과 그 경전인 꾸란 그 어디에서도 ‘자살’을 정당화하거나 부추기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폭력과 살인, 자살은 이슬람에서 절대로 금지하는 것들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자살폭탄공격으로 목숨을 잃게 된 사람의 행위를 점령에 항거하다 사망했다고 생각하지 결코 ‘자살’이라 여기지 않는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탱크가 있다면 땅을 강탈한 유대인 점령촌을 ‘자살’하지 않고도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최신식 미사일과 전투기가 있다면 ‘자살’하지 않고도 이스라엘 정보기관과 군사 시설을 정밀 폭격할 수 있을 것이다. 점령에 저항하기 위한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그 힘을 스스로 죽는 데 쏟아 붓고 싶은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가진 것은 몸뚱아리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 더 이상 의지할 곳도, 추락할 곳도 없는 절망의 가장 끝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자신의 몸을 폭탄으로 만드는 것이다.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점령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온 비판적 지식인 타냐 레인하트 교수도 “지금과 같은 점령정책이 계속되는 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절망적인 인간폭탄(desperate human bomb)을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테러’라는 말은 과연 적절한가. ‘환경학과 평화학’의 저자 토다 키요시의 정의에 따르면 테러는 “비전투원에 대한, 정치적 목적을 갖는, 직접적 폭력”, 즉, 민간인들에 대한 랜덤한(무차별적) 폭력이다. ‘테러’는 그렇기 때문에 민간인들이 아닌 ‘전투원’들이 국가의 명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살해 행위, 군대끼리 하는 직접적 폭력인 ‘전쟁’과는 다르다. 엄밀히 따지자면, 팔레스타인 무장대원이 이스라엘 군 검문소나 군대만큼 철저히 무장한 유대인 점령촌을 목표로 폭탄공격을 실시한다면 그것은 저항이나 반격이 되겠지만(국제법상에서도 식민지민중들의 반점령 무장투쟁을 인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쇼핑몰, 레스토랑, 버스정류장 등에서 민간인들을 무차별 살상을 목적으로 공격을 행사한다면 ‘테러’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공격의 목표가 다른 것조차도 구분되지 않은 채 팔레스타인인들이 공격하면 ‘테러’, 이스라엘군이 민간인 주거지역에 무차별 공습을 감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보복)공격’이라고 부르는 의도적 관행이 문제다. ‘테러’라는 말에서는 무차별적 잔인성이, ‘(보복)공격’이라는 말에서는 합법적인 정당성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위와 같은 단어의 사용은 현대 전쟁이 점점 ‘테러화’-엄청난 수의 민간인 살상이 수반되는-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애초부터 민간인의 살상을 의도하는 ‘국가주도의 테러’라는 점을 은폐한다. 팔레스타인의 공격을 ‘테러’로, 이스라엘의 국가테러를 그저 ‘(보복)공격’이라 부름으로써 자살까지 각오하며 공격하는 팔레스타인의 과격성이 부각되는 한편 이스라엘은 그들이 그렇게도 획득하고 싶어 하는 ‘희생자’의 칭호가 부여된다. 그 어떤 시기를 뚝 떼어놓고 보아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민간인 사상자의 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나는데도 말이다.

3. 자살폭탄테러, 그 이면의 진실을 눈감는 국제사회

“만약 누군가 지난 세기 말에 팔레스타인 인구의 10%를 차지했던 유대인들에게 언젠가는 그들이 인구의 78%이상을 차지할 것이며 예루살렘의 80%는 그 국가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유대인들은 그저 아름다운 꿈 정도로 여기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만약 나머지 90%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말하기를 장차 인구의 4분의 3이 난민이 된 후 영토의 4분의 3을 포기하고 조국의 10~18%의 땅에서 살도록 강요받고, 구멍 난 스위스 치즈처럼 200개의 불법 점령촌이 군데군데 들어서고 이들 점령촌은 악명 높은 장군의 지휘하에 핵으로 무장한 이웃의 보호를 받는다고 했다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악몽을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악몽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점점 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성서에 나오는 삼손처럼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자멸하고 싶어 했다. 바라크 치하에서, 팔레스타인의 돌팔매질과 산발적인 저격에 대응해 이스라엘이 F-16 전투기와 아파치 무장 헬기로 팔레스타인 도시를 공격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민간인들에 대한 자살폭탄공격에 의지했다.“
(마르완 비샤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중)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 공격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94년이다. 그 후 2000년 2차 인티파다를 전후해 크게 증가했다가 최근까지 간간히 일어나고 있다. 94년의 첫 공격은 93년 시작된 오슬로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뼈저린 절망에서 나온 사건이었다. 애초 팔레스타인인들은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을 45년간의 점령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과 나란히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 세워가는 과정으로 이해했고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87년 시작된 1차 인티파다를 거쳐 오면서 군사 점령의 한계에 봉착, 오슬로 협정을 기회로 군사 통제에서 간접통치로 전환하고자 했으며 애초에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 협상 과정에서 드러났다. 몇 년이 더 흐른 후 오슬로 평화협상은 완전한 사기극이었음이 판명되고, 국제사회의 무기력함, 아랍의 불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무능은 팔레스타인을 최후 선택으로 내몰았다. 더욱 극단적인 방법으로 항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더욱 부유해졌고 그들은 더욱 빈곤해졌으며 이스라엘은 팽창했고 이스라엘인들은 야금야금 넓어지는 땅을 자유롭게 돌아다녔지만 팔레스타인은 영토가 줄어들고 그나마 있는 땅도 장벽으로 인해 점점이 봉쇄되어 갔다. 난민들은 난민촌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을 받으면 또 다시 난민신세가 되어 떠도는 일을 반복했다.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닌 이들이 자살공격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상 자살폭탄공격은 국제사회의 팔레스타인 방치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마르완 비샤라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국제사회의 최약자가 기댈 수 있는 보루인 국제법이 강대국들간의 힘의 논리로 좌지우지 될 때, 수많은 유엔안보리의 결의안이 휴지조각이 될 때, 돌팔매질로 실탄과 탱크의 포탄과 미사일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자살폭탄공격을 주저할 이유는 전혀 없다.

2006년 11월,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습에 손자를 잃은 팔레스타인의 60대 할머니가 폭탄을 몸에 지닌 채 이스라엘군에 뛰어들어 그 자리에서 할머니가 사망하고 이스라엘 군인 3명이 다친 일이 있었다. 공격의 주체가 60대 할머니라는 이례적인 소식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언론은 당시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다뤘다. 이유는 간단하다. 폭탄을 두르고 이스라엘 군인들을 향해 달려간 이 할머니를 그저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데 혈안인 광신도, 과격 분자로만 묘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할머니의 급진적인 행위와 허무한 죽음 앞에서 “대체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60대 노인이 어린 시절의 나크바(대재앙-이스라엘의 건국을 일컫는 팔레스타인의 말)로부터 한 평생 겪었을 점령의 고통, 수십년간 지붕 없는 감옥에 갇힌 채 친구와 이웃들이 죽어나가고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땅에 유대인 점령촌이 들어서고, 급기야는 삶에 기쁨을 주던 손자까지 잃게 된 노인의 끝간데 없는 절망과 뼈저린 한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자살폭탄테러’라는 것에 가려진 대부분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자살공격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테러리즘이 약자들의 무기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살폭탄행위가 지난 40년간의 잔인한 점령과 비교되어서는 안 된다. 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는 자신이 팔레스타인인으로 태어났다면 아마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살공격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우리들 자신이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근본적 원인인 이스라엘의 점령, 식민주의에는 눈감으면서 자살공격은 옳지 않다고 성명서나 들이미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