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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정착촌 앞세워 팔레스타인 분할고립

by 미니 posted Apr 1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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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정착촌 앞세워 팔레스타인 분할고립

출처 : 한겨레


중동 깊이 보기

1.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위기의 뿌리

2.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해법은 어디에
3. 사우디 ‘와하비즘’과 위기의 왕권
4. 사우디 경제와 청년실업
5. 이란의 개혁 열망과 한계
6. 이란 여성의 사회참여
7. 걸프지역 왕정과 민주개혁
8. <알자지라>와 <알아라비야>
9. 예멘, 통일 이후
10. 좌담/ 중동과 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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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군인이 3월 9일 요르단강 서안 도시 라말라에서 이스라엘의 분리장벽 건설에 항의하는 시위자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고무총탄을 쏘고 있다. 라말라/AFP 연합


석유 발견 이래 서구 열강의 침탈이 더욱 거세진 비극의 땅 중동의 절망과 분노가 9·11 동시다발 테러 뒤 테러 위협 사전 제거를 명분삼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더욱 깊어가고 있다.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는 서구식 민주주의 및 시장경제 확산을 뼈대로 한 ‘대중동 구상’으로 중동 재편을 압박할 태세고 이에 대한 중동 각국의 속내는 복잡하다. 이른바 ‘중동문제’의 뿌리와 해법은 무엇인가 30여명의 중동 학자들로 구성된 ‘21세기 중동·이슬람문명권 연구사업단’(단장 박종평 한국외국어대 교수)은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을 받아 올해 1~2월 중동 현지를 방문하는 등 연구를 계속해 왔다. 이라크 파병 결정으로 우리에게 한층 더 가깝게 다가온 ‘중동문제’를 이들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10여 차례에 걸쳐 살펴 본다.


군대 주둔 명분 삼아 땅 야금야금
분리장벽 건설로 평화대신 유혈 ‘정착’



이스라엘의 미사일에 처참하게 살해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메드 야신의 최후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오랜 갈등을 다시 한번 세계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어린 팔레스타인 소년들이 중무장한 이스라엘 탱크 앞에서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하는 모습은 언론을 통해 온세계에 숱하게 보도됐다. 유엔을 비롯한 세계의 비난 여론에도 두 쪽의 상황은 전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욱 파국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했는가.

1987년 12월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에 대항해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중항쟁인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대응방식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90년대 초부터 이스라엘 노동당 정부가 본격적으로 추진한 오슬로 평화협상은 그런 배경을 깔고 있다. 94년 5월 ‘오슬로 협정Ⅰ’의 체결로, 이후 5년간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가 구성됐다. 95년 9월에 체결된 ‘오슬로 협정Ⅱ’는 팔레스타인의 요르단강 서안을 에이(A)·비(B)·시(C) 세 지역으로 분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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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인이 밀집한 도시인 ‘에이’ 지역에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치안권과 행정권을 행사했다. ‘에이’지역 인근의 ‘비’지역에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행정권을, 이스라엘이 치안권을 행사했다. 이스라엘 정착촌과 수자원이 집중돼 있는 ‘시’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이 행정권과 치안권을 모두 행사했다. 오슬로 평화협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샤름 알 셰이흐 협정이 99년 9월에 체결돼 ‘에이’지역은 17.2%, ‘비’지역은 23.8%, ‘시’지역은 59.0%로 조정됐다. 그 결과 ‘비’지역과 ‘시’지역인 서안의 82.8%와 가자지구의 40%는 확고한 이스라엘의 군사지배 아래 놓이게 됐다.

요르단강 서안 82% 지배


결국 이런 분할 방식을 통해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전역의 땅과 주민에 대한 통제를 제도화했다. 즉 팔레스타인인들의 도시간 이동은 이스라엘 군인의 철저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된 반면, 이스라엘 식민촌인 ‘시’지역에서 실행돼 온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사업은 강력한 추진력을 얻었다. 이스라엘 쪽에서 볼 때 자국 정착민들의 존재는 군대의 주둔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됐으며, 땅을 현실적으로 확보해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이용돼 왔다. 좌파인 노동당 정부나 우파인 리쿠드당 정부 구별 없이 이스라엘의 모든 정권들은 정착촌 건설 사업을 유례 없이 확대·강화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정착민의 수는 90년대 이전보다 2배 이상 증가해 2002년에는 42만명 이상이 이 지역에 거주하게 됐다. 〈오른쪽 표〉는 세계적으로 선전된 평화협상 기간에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이 실행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협상 기간 정착촌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마을을 관통해 정착촌과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관통도로와, 팔레스타인 도시들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에 촘촘히 박힌 이스라엘 검문소는 요르단강 서안을 철저히 망가뜨렸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도시와 마을 단위로 완전히 갇히게 됐고, 팔레스타인 도시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가둔 거대한 감옥으로 변하게 됐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구실은 폐쇄된 도시 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감옥 안의 간수’로 자리매김됐다.

팔레스타인 권리는 무시한 평화협상


그리하여 오슬로 평화협상 초기에 이 협상이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정착시킬 것이라는 환상을 갖기도 했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최종 지위 결정을 위한 2000년 7월 캠프데이비드 협상에서 쓰라린 환멸을 맛보았다. 이 협상에서 노동당 정부는 이스라엘에 인접한 서안 일부와 정착촌 합병, 서안의 수자원과 천연자원 장악, 영공 장악, 팔레스타인 국가의 비무장화, 모든 경계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벽한 통제권 확보 등을 주장했다. 반면, 핵심 쟁점이었던 이스라엘 정착촌 제거,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와 이슬람·기독교·유대교 등 세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문제, 1967년 경계 회복, 천연자원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는 완전히 부정됐다. 이것이 2000년 9월28일 팔레스타인인들의 2차 봉기가 발발하게 된 원인이다. 2차 봉기 동안에 격화된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폭탄 공격은,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무자비한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에 저항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필사적인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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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공격 불사 몸부림

그런데 2002년 6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이스라엘과 나란히 평화롭고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의 창설”을 제안하는 연설을 했다. 이런 제안은 2003년 6월 ‘중동평화 이정표’(로드맵)로 구체화했다. 이정표는 당면한 위기의 원인을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공격이라고 진단했다. 그 처방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국가 창설 가능성’을 미끼로 이스라엘을 대신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를 해체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현재 대다수 팔레스타인인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반면, 부패한 자치정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내부개혁 요구에 직면하고 있으며, 무장단체들을 통제할 만한 능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이스라엘은 2003년 6월 이후에도 정착촌 건설 사업을 중단 없이 추진해 오고 있으며, 이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투쟁도 절망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 평화운동 단체 ‘피스나우’의 아리엘 아르논 교수는 이스라엘 정부의 정착촌 건설 사업이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험에 빠뜨리는 주범이라고 지목한다.

이 지역의 평화는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공격, 서안에서 인종차별적인 분리장벽 건설, 허울만 좋은 말잔치로는 결코 확보될 수 없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투쟁을 유발하고 격화시켜 온 이스라엘이 공세적인 정착촌 건설 사업을 즉시 중단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홍미정/한국외국어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역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