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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아랍
2005.03.08 11:15

아랍권, 분열인가 개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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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에서 친시리아계 내각이 전격 총사퇴한 뒤, 야당 지도자 왈리드 줌블라트(진보사회주의당 당수)는 각종 언론매체와 잇달아 인터뷰를 하면서 아랍 민족주의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 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진 ‘반시리아 인티파다’를 애국적 아랍주의 운동이라고 주장했다. 줌블라트는 시라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것이 곧바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에 나서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시리아군 철수 요구가 범아랍주의 거부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하는 아랍 애국주의는 시리아의 집권 바트당이나 여타 아랍주의 운동단체들이 그동안 주장해 온 전통적인 형태의 범아랍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했다.

줌블라트의 주장이 중요한 것은 현대 아랍 민족주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존경받는 아랍 지도자가 민주주의적 대안을 담은 아랍 민족주의 이념을 내놨다는 데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아랍권에서 개혁과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요구와 지침에 따라 나온 것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아랍 지도자가 이웃 아랍나라의 군대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그 나라와 선린우호 관계는 계속해서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분명 대부분의 아랍인들에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일 수 있다.

대중적 반대시위에 밀려 내각이 총사퇴하기에 이른 레바논 사태는 여러 측면에서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사태는 평화적 민주화 운동이 동시에 애국적인 운동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아랍권 23개 나라에 사는 대다수 아랍인들에게 충격을 줬을 것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른바 중동 민주화론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아랍 민주주의 세력들은 이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부시 행정부의 주장 가운데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아랍권 전역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민주화 요구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보호, 문민통치를 요구하는 아랍인들의 목소리는 극심한 탄압을 받아왔다. 민주화를 요구한 인사들은 언제든 투옥될 수 있다는 위협에 시달렸고, 심지어 정치테러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이런 탄압에서 용케 살아남은 이들은 압제정권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부과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아랍의 상당수 민주화 운동가들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점령으로부터 민주적 독립을 얻어내야 한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치정부의 압제로부터도 해방돼야 한다고 믿는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강경 이스라엘 점령자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방침을 폐기하지 않은 채로 아랍 민주화를 촉구하자, 상당수 아랍 지식인들이 싸늘하게 침묵을 지켰다. 부시 대통령의 주장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칫 이스라엘군의 가혹한 점령정책과 가옥 파괴·암살 등 인권유린 행위로부터 해방되기를 염원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한 탓이다.

최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것은 아랍권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상당히 고무적인 상황 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마무드 아바스 신임 수반은 능력있는 경쟁자들과 맞서 압승을 거뒀지만, 그가 얻은 지지율은 아랍 지도자 상당수가 통상 얻고 있는 90% 남짓에는 턱없이 낮았다. 팔레스타인에 이어 이라크에서도 총선거가 실시된 것은 레바논에서 국민적 저항이 모아지는 데 중요한 함의를 던져줬을 것이다.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극작가인 알리 살렘이 〈시엔엔〉에 나와 “이집트인들은 레바논에서 벌어진 사태를 부러워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레바논에서 벌어진 ‘반시리아 인티파다’는 아랍권 전역에 강력한 민주주의적 본보기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사태 진전이 미국이 공공연히 밝힌 중동 민주화 계획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고,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중동 민주화 운동가들은 레바논에서 벌어진 평화로운 시위를 애국적인 행동으로 평가한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사람들의 반시리아 집회를 보면서 만족감을 표했지만, 야당 지도자 줌블라트의 발언은 이스라엘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의 발언으로 미뤄 시리아군이 철수한 뒤에도 레바논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을 것이라고 낙관하긴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아랍권에서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두 나라 국민이 외국군의 무장 점령 치하에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아랍 나라 사람들도(외국군 점령 못지않게) 힘겹고 고통스런 압제에 시달리고 있다. 아랍권이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된 채 희망조차 없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참한 현실에서도 마침내 희망의 단초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해, 평화와 민주주의·인권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가닥 기쁨을 주고 있다.

다우드 쿠탑/ 팔레스타인 언론인

출처 : 한겨레 http://www.hani.co.kr/section-001000000/2005/03/0010000002005030719393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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