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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4 16:22

나지 알 알리에 관해서

(*.49.92.159) 조회 수 15297 추천 수 0 댓글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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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지 알 알리

 

 87년 7월 22일 수요일 영국에서 한 방의 총성이 들려왔다. 수많은 역사 속에 그저 그렇게 지나칠 수 있는 총성이기도 했지만 그 총에 머리를 맞은 사내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양심이자 지성이었던 카투니스트 나지 알 알리(Naji Al Ali)였다. 그는 첼시의 이브스 거리에있는 알 카바(쿠웨이트의 신문)사무실 앞에서 봉변을 당했다.(아직 암살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 후 런던의 ‘St Stephen's and Charing Cross 병원’에서 5주간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한 채 미약한 숨을 움켜 쥐고 있던 그는  8월 30일,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나이 51세.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첫 번째 인티파다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듬해 표현의 자유에 기여한 언론인에게 국제 신문 발행인 연합 (International Federation of Newspaper Publishers, FIEJ)에서 주는 ‘골든 펜’ 상을 받았다. 나지 알 알리는 이스라엘의 점령과 그에 대항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를 지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초상화다. 그의 그림은 팔레스타인을 넘어서 아랍인들의 생각과 일상생활, 그리고 부당한 힘과 권력아래 그들이 얼마나 핍박당하고 있는 지 모든 문자와 가치관을 넘어서 온전하게 보여준다. 그는 살아 생전 이스라엘의 살해 위협에 시달렸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는 정치적 지향점, 종교적 가치관, 민족적 이데올로기, 문화적 배타성을 넘어서 모든 부조리들을 살아있는 선으로 표현했다. 아랍 세계 안에 만연한 자유의 부재와 광범위한 차별도 날카로운 그의 펜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권력과 부조리의 비판자이자 진짜배기 자유주의자였던 셈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나지 알 알리는 지독한 검열에 시달렸고, 감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나지는 생전에 수많은 살해 위협을 당했는데, 난민촌의 꼬마로 11살 때 고향에서 쫓겨난 후 도피와 망명그리고 죽음은 그의 삶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중동지역에 위치한 모든 국가의 요주인물 중 하나였고, 이 때문에 레바논과 쿠웨이트, 런던 등을 떠돌며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지냈지만 한번도 창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부조리에 대해 언어로, 몸으로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림을 그릴 뿐이었고 그것은 곧 그가 저항하는 방식이었다.

 

2. 나지 알 알리의 생애

 

그는 36년 혹은 37년 즈음에 갈릴레의 나자레스와 티베리아 사이에 위치한 ‘알 샤자라’ 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48년 그가 11살 때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매우 당연하게도’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난 후, 가족을 따라 남부 레바논의 시돈에 있는 난민촌인 ‘아인 알 헬웨’에 정착했다. 나지 알 알리는 시돈에서 학교 교육을 마칠 수 있었으나 그가 원하던 미술 학교에 들어가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난민촌에서의 삶은 비참했고, 당장 먹을 것 조차 없는 상황에서 학교는 사치에 불과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폭력과 억압에 항거했지만 거지 소굴과 같은 난민촌에 쫓겨나 살고 있던 그들의 목소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에 쫓겨나 레바논 땅에 발을 들인 그들은 불청객이었다. 결국 난민촌의 치안과 정치공작을 맞았던 레바논의 ‘중앙정보부’격인 Deuxi'me Bureau를 모욕했다는 죄로 나지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난 레바논 감옥에 있을 때, 정치적 표현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감옥의 벽에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을 본 ‘알 후리아 매거진’의 언론인이자 출판가인 가산 카나파니 (그는 베이루트에서 71년 암살당했다.)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리고 그의 잡지에 내가 그린 카툰 몇 개를 실어주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60년대 초반, 나지는 쿠웨이트로 떠나 그가 원하던 미술을 공부 한 후, 그곳에 있는 ‘알 탈리아 매거진’에 일자리를 구해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10 여년 후 다시 베이루트로 돌아와서 레바논의 영향력 있는 신문인 ‘알 사피르’의 편집국에서 활동 하게 된다. 그는 나중에 이 시절을 회상하며 그에게 있어 가장 위험하면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인 시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변에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그림을 그렸고, 누군가가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을 때도 숨어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아랍 에미리트의 ‘알 칼리즈 신문’에도 카툰을 연재했다.

 

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기간동안 나지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사브라’와 ‘샤틸라’ 마을에서 끔찍한 대학살을 목격하게 된다. 그 지독한 경험은 결국 그가 사랑하던 난민촌을 떠나 쿠웨이트에 정착하도록 했다. 이때 그는 중동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이 있었던 알 카바스 (우리말로 ‘빛’이라는 뜻)와 알 칼리즈 신문에 카툰을 그렸다. 하지만 결국 85년에 정치적인 이유로 쿠웨이트를 떠나 런던으로 망명한 후 나지는 알 카바스에 계속 작품을 연재한다. 그의 작품은 카이로, 베이루트, 쿠웨이트, 튀니지, 아부다비, 런던, 파리에서 우파에서 좌파 언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연재되며 서구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나지 알 알리는 정치 정당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의 작품엔 슬로건도 도그마도 없었다. 그는 테러, 그리고 민주주의의 부재에 반대했고, 아랍세계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애썼다. 이 때문에 그는 호평을 받으면서도, 과격한 비난세력을 몰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3. 한잘라(Hanzala, 혹은 Handala)

 

 한 꼬마아이가 카툰에 계속 등장한다. 한데 이상하다. 이 꼬마아이는 뒷짐을 지고 손을 모으고 있으며 항상 독자 앞에 서서 카툰을 들여다 본다. 독자는 이 녀석이 카툰의 세계에도,  현실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에 위치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지는 이 캐릭터에 아랍어로 ‘쓰라림(bitterness)’을 의미하는 한잘라(Hanzala)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잘라는 나지 알 알리(Naji Al Ali)의 카툰에 꼭 등장하는 캐릭터다. 나지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나지의 ‘사인(signature)’이자 ‘상징(symbol)’이며 ‘초상(icon)’이다.    

 

한잘라는 나지의 검열관이자 나지가 하는 행동의 목격자다. 나지는 스스로 자기 작품에 대한 감시자를 설정한 후, 자신의 마음이 엇나가는 것을 ‘경계’하는 역할을 부여한다. 한잘라는 말하자면 그의 ‘초자아’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은 그것이 일반적인 도덕적 표상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만들어낸 족쇄라는 것이다. 작품을 생산하는 데 있어 스스로 검열관을 세운다는 것, 그리고 그 검열관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보인다는 것은 매우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을 창조하는 데 일정한 제한을 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삶과 경험이 그로 하여금 검열관을 세워야 할 어떤 ‘사명’을 부여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상상력의 힘을 예찬하는 낭만주의적 성향을 가진 통상적 의미의 예술가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언론인이자 투철한 리얼리스트인 ‘지식인’의 역할을 자임한 셈이다. 그는 아마도 ‘변절’을 가장 두려워했던 것 같다.

 

한잘라 라는 족쇄는 그를 성장이 멈춘 10살 남짓한 어린 시절의 시선으로 그의 카툰을 고정시킨다. 결코 사회의 관성에 휘둘리는 자신의 모습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인 것이다. 또한 한잘라는 난민촌의 흔히 볼 수 있는 맨발의 꼬맹이다. 나지는 자신이 난민촌 생활을 통해, 보고 경험한 것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자신의 카툰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거지처럼 살며 억압당하던 바로 그것이어야마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서도 굳이 예술가적 낭만성을 찾으려 한다면, 그가 끈질기게 놓지 않았던 ‘희망’을 대하는 그의 태도일 것이다.

 

4. 나지 알 알리의 작품 세계 1 -한달라를 중심으로

 

나지의 카툰 3중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카툰 안의 공간, 그리고 나지가 들여다 보는 공간, 카툰과 나지를 들여다보는 독자의 공간이 그것이다. 독자가 속한 현실세계의 공간을 제외하면 카툰 안에 표현된 내용과 한잘라가 보고 있는 세계가 눈앞에 있는 셈이다. 이 낯설음은 카툰과 독자가 소통을 하는 것을 방해한다. 독자는 나지의 카툰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이 꼬맹이가 거슬린다. 독자는 카툰의 공간이 나뉨으로써 누군가 나와 함께 카툰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 누군가는 팔레스타인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은 난민촌 거지 아이인 것이다. 이 꼬맹이는 급기야 독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독자는 카툰에 표현된 모든 상황을 이 난민촌의 꼬맹이와 결부시키게 된다. 말하자면 작품을 보는데 있어 하나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한잘라의 출연”이라는 나지의 독특한 표현방식은 나지의 모든 카툰을 꿰뚫으며, 개개의 작품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의 모든 카툰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편의 거대한 작품으로 다시 탄생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그 것은 그의 치열한 삶과 동의어 관계를 이룬다.  

 

한잘라는 항상 뒤돌아 서있다. 독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항상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눈앞의 현상을 관조한다.(한잘라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독자는 절대 알 수 없다.) 한잘라는 보통 카툰 안에 들어가 목격자의 역할을 하지만, 간혹 손을 뻗쳐 적극적인 행위를 할 때도 있고, 네모난 칸 밖에 나와 독자와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표현된 작품을 감상하기도 한다. 이 것은 나지가 표현하는 한잘라의 신중한 행동양식인데, 이 미세한 균형이 깨지고 한잘라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된 소름끼치는 사건이 나지의 삶 속에 등장하게 된다. 나지는 어린시절 ‘베이루트의 도살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우는 아리엘 샤론 전 ‘국방장관’의 결정으로 자행된 이스라엘의 82년 ‘레바논 침공’의 한 복판에 있었다. 그가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이 ‘사브라 샤틸라 학살’로 더 유명해진 계기를 제공한 이 사건은 나지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스라엘은 1982년 레바논에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근거지를 분쇄한다는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해 베이루트까지 진격하게 된다. 이 작전을 기획하고 지휘한 인물이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Sharon) 이스라엘 총리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던 레바논의 파시즘 성향의 기독교 정당인 팔랑헤당의 민병대는 기독교 세력 출신의 바시르 제마엘(Gemayel) 대통령이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세력의 테러로 폭사하자 이를 보복한다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난민촌인 사브라와 샤틸라(Sabra and Shatilla) 마을을 봉쇄했다. 나지는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인 베이루트의 알 사피르 신문에 카툰을 싣고 있었다.

 

기독교 민병대는 82년 9월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3000여명(비교적 보수적인 통계를 인용해도 이 학살에서 275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히고 있다.) 을 잔혹 하게 학살했다. 학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민간인들이며 그 중에는 여자와 어린이들도 많았다. 학살 극이 벌어지는 동안 이스라엘군은 탱크로 외곽을 포위하고 있었으며 학살극이 벌어지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실제로 학살을 ‘방조’한 것이다. 학살이 끝난 직후 이스라엘군은 서둘러 자리를 뜨게 된다.

 

나지는 이 침공에서 1만명의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9만명의 이스라엘 군인에 처절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물론 그 자신도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대피호에 숨어 머리 위에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고백한다. 그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포탄소리에 묻힐 때, 꽃을 그렸고 팔레스타인 국기를 그렸다. 하지만 이 당시 전 세계는 스페인에서 열린 화려한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의 침공과 학살을 표현한 나지의 그림은 2차대전 당시 나찌의 게르니카 학살을 주제로 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주권을 가진 한 국가의 상징인 레바논의 깃발이 포탄에 의해 찢겨 나가는 묘사는 그의 작품에 단골로 등장한다.

 

사브라 샤틸라 마을 학살 사건 이후 나지의 카툰은 변모하게 된다. 즉 뒷짐을 지고 무뚝뚝하게 서있는 한잘라가 적극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가장 극명한 부조리에 대해 더 이상 한잘라를 침묵하도록 할 자신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한잘라는 카툰 안에 들어가 직접 돌을 집어들어 던지기도 하고 척박한 대지에 싹튼 팔레스타인 깃발을 보고 만세를 부르기도 하며, 주먹을 쥐고 항의하기도 한다. 그가 저항하는 방식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5. 나지 알 알리의 작품 세계 2  - 상징, 그리고 은유

 

나지의 카툰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바로 꽃이다. 나지가 그리는 꽃은 또한 ‘평화’를 꽃말로 삼은 데이지와 많이 닮았다. 데이지는 몸이 누더기가 되어 죽어가는 슬픈 표정의 여자아이가 들고 있는 꽃이며, 한잘라가 아름다운 팔레스타인 여인에게 바치는 꽃이 되기도 한다. 또한 데이지 꽃이 피어 있는 돌 밭에서 돌을 집어드는 한잘라의 행위는 바로 팔레스타인 인들이 평화를 얻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말해주고 있다. 돌을 집어 든 손에서 흐르는 피는 팔레스타인 독립과 평화를 상징하는 데이지 꽃의 자양분이 된다. 이처럼 나지의 카툰에서 돌을 집어들고 던지는 행위는 매우 숭고하게 그려진다. 그것은 압도적인 힘 아래 신음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평화를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이 저항뿐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나지의 사망 후 광범위한 인티파다(민중봉기)가 일어났고, 그들은 평화를 위해 주로 돌을 들었다.

 

철조망은 매우 날카로운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리고 소름끼치는 장면을 연출해내는데 매우 유용하다. 철조망은 단절의 이미지이자 경계의 이미지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유태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길이 40킬로미터를 철조망과 장벽으로 둘러 쳤다. 라파 검문소(작년 11월에 팔레스타인 관할로 이양되었다.)로 상징되는 이 철조망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조리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몰았으며, 거주와 이동의 자유를 박탈했다. 생계를 위해(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실업율은 50~60%에 달하며, 먹고 살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지구로 들어가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철조망을 뛰어 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철조망의 날카로운 가시에 상처를 입는다. 나지는 분단과 좌절의 상징으로 철조망을 그린다.

   
그리고 이러한 철조망위에서 독보리가 자라기도 한다. 독보리는 성서에 ‘독보리(혹은 가라지의 비유)의 비유’로 등장하기도 하는 잡초인데, 보리씨에 독보리씨가 섞여 있는 것을 비유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스런 형태의 천국"이 모조품 왕국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독보리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다(마태복음 13장 38절). 진정한 기독교인들 사이에 기독교인처럼 행동하고 이것을 선량한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하는 이 구절은 천국의 멸망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독보리는 천국의 존속에 있어서 “지옥으로 가야할” 것들이고 레바논에 있는 파쇼적 성향의 기독교집단(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의 전범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독보리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잡풀 중 하나로 나지의 고향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독보리는 나지의 카툰에서 채찍으로 변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나지의 집안 형편은 썩 나쁘지 않았다. 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전쟁’이라 부르는 학살이 있었을 때 나지의 가족은 전쟁의 트라우마를 헤치고 정든 집을 떠나 레바논 국경 부근에 텐트를 치고 사는 피난민으로 전락했다. 나지는 그의 어머니가 당시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2주 안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던 것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녀는 다른 모든 팔레스타인 여인들과 똑같이 집 열쇠를 죽을 때까지 목에 걸고 있었다. 이 기억은 나지의 카툰에서 열쇠를 걸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인으로 등장한다. 열쇠는 집을 잃어버린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슬픔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지는 한잘라를 등장시키고 자신이 누구에게 펜 끝을 향해야 하는 가에 대한 고민을 한시도 놓지 않았지만, 적을 정해놓고 비판하지는 않았다. 한잘라는 그가 가지고 있는 한그루 이성의 나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모든 부조리함에 붓을 휘둘렀다. 이스라엘의 배후에있던 미국의 뻔뻔함과 잔인함, 그리고 속물적인 경향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아랍 세계 내, 여러 국가들의 무책임한 행태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날카롭게 갈았다. 그의 카툰에 나타난 채찍을 맞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등에 흐르는 피는 성조기로 변해가기도 한다. 주로 아랍세계 내의 빈부 격차, 식민 부르주아의 이기적인 행태들을 표현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노골적인 표현들을 사용했다.

 

따라서 (매우 당연하게도)그에게 적은 다양하게 존재했고 암살의 위협에 지겹게도 시달렸던 것이다. 나지의 카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수많은 비밀조직들은 나지의 이름을 현상범 리스트 0순위에 올려놓았다. 이 때문에 나지는 자신을 현상범으로 표현하는 카툰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나지는 심지어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PFLP(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의 젊은 전사들을 죽음으로 내보는 부패한 지도층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그림을 그렸던 나지 알 알리. 그의 창조력은 오히려 이런 긴장들, 그리고 그 긴장을 넘어서 ‘예술가적 비전’으로 볼 수 있는 ‘희망’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6. 나지 알 알리 어록

 

“내가 어렸을 때, 나는 내가 독립과 통일, 정의를 위한 우리의 모든 염원을 성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염원을 위해 죽어가는 만큼, 모든 것은 점점 잘못되어갔다. 확실히 그것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보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의무감을 느꼈다.”

 

“71년 베이루트의 알 사피르 신문에서 일을 했을 때가 내 삶에 있어 최고의 시절이었다. 그리고 가장 생산적인 시절이기도 했다. 군인들의 폭력에 포위됐던 때도, 이스라엘의 폭격 속에서 숨을 죽이던 때도, 나는 그곳에서 나의 펜과 매일 마주 대했다. 나는 결코 공포, 실패,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고 절대 항복하지도 않았다. 나는 카툰 속에서 군인과 맞닥뜨렸고, 꽃, 희망, 총알 등을 함께 그렸다. 그래, 희망이 언제나 본질이었다. 베이루트에서의 내 작품은 나를 난민촌의 가난과 비참함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아이는 당신도 보면 알 수 있듯 그다지 예쁘지도 멋있지도, 또 응석받이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그는 맨발의 다른 난민촌 캠프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그는 못생겼고, 어떤 여자도 이처럼 생긴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한잘라 라고 부르는 그는 상냥하고 정직하고 솔직한 부랑아다. 그는 내가 엇나가는 것을 봐주는 아이콘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뒷짐을 지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지역의 모든 부정적인 흐름을 거부한다는 상징이다.

 


2007년 8~9월, 팔레스타인 만화가 나지 알 알리 작품 전시회를 준비하며 마련했던 나지 알 알리에 관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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