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이스라엘 도장이 버젓이 찍혀 있는 내 여권>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이스라엘이 관리하는 국경을 통과해야 합니다. 또 중동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여권에 이스라엘에 입국했던 흔적이 있으면 시리아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여러 차례 시리아와 전쟁을 벌였고 지금도 골란고원을 점령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에 갔다가 시리아로 갈 계획이 있는 사람은 국경에서 ‘노 스탬프’라는 말로 여권에 도장을 찍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권이 아닌 별도의 종이에 도장을 찍어주고, 여행자들은 그것을 들고 다니면 됩니다. 지난 2006년에 팔레스타인에 왔을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번에도 공항에서 당연히 ‘노 스탬프’라고 말했고, 별도의 종이에 도장까지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통과하는데 우리만 다른 방으로 불려가서 한참 동안 귀찮은 문답을 해야 했던 것도 ‘노 스탬프’와 관련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공항을 통과한지 1달 반이 지난 어제서야 여권에 이스라엘 도장이 버젓이 찍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눈앞에서는 별도 종이에 도장을 찍어 주고, 왜 ‘노 스탬프’냐고 묻기까지 하더니 안 보는 사이에 여권에 도장을 찍은 거죠. 입국할 때부터 귀찮게 하더니 출국하고 나서까지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만드시는 이스라엘입니다.
예루살렘을 뺀 서안지구만?
한국 사람들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입국 때 받은 도장만으로 3개월 동안 1948년 점령지(흔히 이스라엘)와 1967년(흔히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점령지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스라엘이 외국 여권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제한함'이라고 찍혀 있는 여권. 출처 : Electronic Intifada http://electronicintifada.net>
주로 북아메리카와 유럽 지역 국가가 발행한 여권에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제한함(Palestine Authority Only)'이라는 도장을 찍는 겁니다. 아직은 시행 초기인데 이 제도가 확대․강화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지역보다는 서안지구나 가자지구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지역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자치지구로 제한함’ 도장을 가지고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가는 것은 물론이고 벤구리온 공항을 거쳐 서안지구로 올 수도 없겠지요. 결국 요르단을 통해 육로로 들어와야 합니다.
요르단을 통해 서안지구로 들어 왔다고 하지요.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데 이 도장으로는 예루살렘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주장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일부이고, 자치지구 관할이 아니라는 거지요.
어떤 사람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라말라 출신인데 지금은 미국 시민권과 여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이 사람은 지금까지는 그 여권을 가지고 라말라도 가고 나블루스도 예루살렘도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면 예루살렘으로는 갈 수 없게 되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서 예루살렘은 또 한 번 멀어지게 되는 거지요.
다른 단체들이 그렇듯 ABCD라는 국제단체가 서안지구의 두 주요 도시인 예루살렘과 라말라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가들이 오가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원해 왔다고 하지요. 그런데 새로운 비자 제도가 확대 시행되면 국제 활동가들도 지금과는 달리 라말라와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오갈 수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로써는 외국 여권을 가진 팔레스타인인이 예루살렘을 오가는 것도 막고, 가뜩이나 꼴 보기 싫은 국제 활동가들의 이동도 차단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가 봤니?
가자지구에 있는 칼리드가 한 번씩 전화를 해서 잘 있느냐, 필요한 것은 없느냐, 언제 가자지구에 올 거냐고 묻습니다. 3년 전에 가자지구에 갔을 때 잠깐 만났던 것도 인연이라고 그렇게 안부를 묻고 보고 싶어 하는 거지요. 저도 마음은 지금이라도 가자지구에 들어가고 싶지만 이리저리 알아 봐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2006년 하마스의 총선 승리 이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기념일을 맞아 이스라엘 깃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 군인과 경찰이 아랍인들의 통행을 차단했다>
외국인인 제가 그런데 팔레스타인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일단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는 서로 오갈 수 없습니다. 1948년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인들은 서안지구로 오기 수월하지만 서안지구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어지간해서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갈 수 없습니다.
한 팔레스타인 친구와 제가 팔레스타인에 와서 찍은 사진을 쭈욱 넘겨보며 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찍은 사진이 나오자 여기가 어디냐고 하기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표정이 약간 어두워지면서 ‘예루살렘에 가 봤니?’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또 아무 생각 없이 예루살렘 갔던 얘기를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오래전부터 팔레스타인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료의 중심지입니다. 특히 예루살렘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승천을 했던 곳이라 믿는 지역이기 때문에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의 주요 성지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도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고 특히 요즘은 라마단 기간이라 더욱 가고 싶어 하지요.
<그냥 보면 평범해 보이는 예루살렘>
하지만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팔레스타인인이 아니겠지요. 만약 라말라 출신 35세의 한 팔레스타인 여성이 예루살렘 입구 검문소에서 군인에게 예루살렘에 가고 싶다고 하면 그 군인은 “예루살렘? 좋아. 가고 싶으면 가. 10년 뒤에 말이야”라고 할 겁니다. 서안지구 주민들 가운데 남성은 50세 이상, 여성은 45세 이상의 사람들만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하니깐요.
서안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예루살렘에 가 봤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가 봤다고 합니다. 언제 가 봤냐고 물으면 모두 어릴 때 가 봤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이 들거나 어린이들만 예루살렘에 갈 수 있고, 나머지는 이스라엘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허가가 잘 안 나오는 거지요.
예루살렘에 가 봤다고 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유를 알겠지요? 그 눈빛을 받으며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 제가 미안해지는 이유도. 그리고 팔레스타인 친구가 ‘내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보다 미니가 한국 가는 게 더 쉬울 거에요’라고 할 때 두 사람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무거운 마음을.
집 나간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이스라엘 스스로도 그렇고 가끔 어떤 책에 보면 이스라엘을 중동지역의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미국 하원의장인 펠로시는 지난 2008년 5월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이스라엘을 ‘민주주의의 등대’라고 표현했지요
<신각수 외교통상부 제2차관>
한국 외교통상부 신각수 제2차관은 지난 3월 매일경제에 기고한 ‘워킹홀리데이로 위기서 기회를’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사 직접 보기 http://news.mk.co.kr/newsRead.php?no=154861&year=2009 )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이웃으로 둘러싸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목전에 둘 정도로 민주주의와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런 성장의 이면에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2~3년 병역의무를 마친 후 대학에 가기 전 1년 정도 세계를 여행하면서 세상 물정을 익히고 국제 감각을 배양하며 장래 기회의 창을 모색하는 것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신각수 차관의 생각과는 달리 해외여행을 다녀보신 분들은 직접 경험을 하셨거나 아니면 소문으로 막 군대를 다녀온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해외여행 과정에서 예의 없고 막무가내식의 행동을 했던 것을 듣곤 하셨을 겁니다.
<이스라엘의 점령과 아랍권의 독재와 부패를 만화로 표현하다 암살당한 나지 알 알리의 그림. "양심수를 석방하라">
민주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선에서 하마스가 승리를 하자 이스라엘은 미국, EU와 함께 하마스가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경제봉쇄와 군사공격을 감행해서 하마스 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의회의 의원과 정부의 장관 다수를 체포했습니다. 지난 9월2일 이스라엘이 9명의 의원을 석방 했지만 여전히 24명의 의원과 장관 2명이 이스라엘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신각수 차관님, 민주적인 선거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무력으로 엎어 버리는 이스라엘에게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렇게도 가고 싶어 하는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도 갈 수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한숨 앞에 이스라엘의 민주주의는 지금 가출이라도 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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