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파일 팔레스타인 운동의 역사

중동근현대사 세미나 발제문입니다. 36년에도 팔레스타인에 큰 투쟁이 있었으나  생략하고 48년 이후의 역사로 한정합니다

 

➤ 이스라엘 건국, 나크바 1948-1967 시기
1) 정치적 상황
  • 1947.11.29 유엔결의안 채택 (유엔총결의안 181호)
    : 팔레스타인은 경제적 통일을 바탕으로 아랍인 국가와 유대인 국가로 분할하며 예루살렘은 유엔의 신탁 하에 둠
  • 유능하고 준비된 시오니즘 대표자들이 이미 분할안을 만들어 운스콥 위원들에게 전달, 반면 팔레스타인은 전혀 그렇지 못함
  • 유대지도부는 불안감을 활용해 공동체 동원(징병 확대, 강제 과세, 신규 이민자 유입 등)
  • 1차 중동전쟁(팔: 팔레스타인전쟁 /이: 독립전쟁, 해방전쟁)
    :팔레스타인인들은 나크바로 각인되며 민족운동을 단결시켜 원주민들의 운동이라는 자아상 갖게됨, 이스라엘은 영국 식민주의와 아랍의 적대 행위에 맞선 민족해방운동으로 기억
  • 1948.5.15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 및 이스라엘 건국
  • 요르단 압둘라 국왕은 분할안을 두고 유대쪽과 협상 ->팔레스타인 동부는 요르단에 의해 병합
팔레스타인 인종청소 및 난민 1948
  • Plan D : 영국의 바톤을 이스라엘이 이어받아 군사, 민간 시설 장악 / 팔레스타인 추방 및 인종청소
  • 1948.4 .9 데이르야신 : 이르군과 스테른갱이 예루살렘 서쪽 마을 공격해 250명 학살
  • 5월 중순 무렵 팔레스타인 전체 주민의 1/3이 쫓겨남, 75만명의 난민 발생(90% 인구), 유엔 구호품에 의존
  • 빈부의 차이없이 난민들은 집단적, 개인적 외상 경험, 잃어버린 고향을 중심으로 정체성 형성
  • 1949 1월 운르와 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 for Palestine Refugees 설립 : 실제로 난민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미국 사업가들이 고안한 일종의 마셜플랜, 운르와가 난민촌의 주요 고용주가 됨
  • 유엔의 난민의제 : 난민의 무조건적인 본국 귀환, 예루살렘의 국제관리, 두 인구 집단의 분포에 따른 땅의 분할
  •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등지의 나라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은 2등시민
  • 50년대 말에 이르러 48나크바 이후 팔레스타인에 대한 뚜렷한 목표 :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 cf)가산 카나파니- 불볕속의 사람들, 하이파에 돌아와서

네 사람 중에 그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애를 쓰느라 기진맥진해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각자가 자기 생각에 빨려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거대한 트럭은 새로운 미지의 운명을 향해 커다란 문을 밀어젖히듯이 그들의 꿈, 가족, 희망과 포부, 곤궁과 절망, 힘과 나약함, 과거와 미래와 함께 그들을 길 위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모든 눈은 보이지 않는 실로 묶인 듯이 그 문의 표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2) 팔레스타인 정치적 운동
  • 무슬림 형제단
    1928년에 이집트에서 하산 알-반나가 창건한 범이슬람 운동
    1950년대 난민촌에서 상당한 추종자들을 거느린 유일한 조직, 가자/서안지구에서 모두 활동
    농민, 하층 중간 난민촌 계급에게 어필 (당시 팔레스타인과 아랍 세계에서 민족 지도부들이 철저하게 실패 후 이들로서는 세속 정치 영역에서 기대할 것이 없었음)
    종교적 활동가보다는 민족주의의 투사로서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모델
  • 투사(fidai)의 발생
    처음에는 개인주의적으로 시작 이후 유대 커뮤니티를 상대로 무장 공격, 점차 체계적인 전투로 조직 -> 이스라엘의 가혹한 보복(수행한 특수부대가 이스라엘방위군IDF 특공대 중추)
    활동의 중심지를 가자에서 요르단으로 옮긴 후 젊은 구성원들의 투입->명사 가문들의 권위 더욱 약화
  • 파타FATHA
    ‘팔레스타인해방운동’이라는 뜻의 아랍어 머리글자를 거꾸로 하면 ‘승리’라는 파타의 뜻
    야세르 아라파트 Yasser Arafat, 말릴 알-와자리 Khalil al-Wazir 등이 중심이 되어 두 사람이 가자의 난민촌에서 활동하면서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민족 조직 구성
    54년에 이르러 이스라엘을 상대로 소규모 파괴 공격 개시, 무슬림형제단을 활용해 이집트 군에서 투사들을 빼내 끌어들임
    58년 나세르가 시리아와 이집트 통일해 통일아랍공화국UAR 수립(시리아 장교들이 바트당과 연합 3년만에 붕괴)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는 수단이 아닌 허약한 통일국을 유지하기 위한 연결망의 일부 : 파타의 역할 모양이 갖추어진 건 이런 지정학적 상황
    58년 이후 파타가 정치적으로 부상 : 잡지 ‘우리의 팔레스타인 Filastinuna’ 창간 지지자 넓힘, 시리아 밀접한 관계로 군사적 역량 유지, 학생 노동자와 같은 젊은 구성원이 주축, 강력한 이데올로기 (팔레스타인은 해방되어야, 이스라엘 쳐부숴야)
  • 아랍민족주의자운동
    51년 베이루트에서 창설된 좌파 난민 운동 단체, 중간계급에게 정치적 이슬람이 대안이 아니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팔레스타인 도시민 조직
    대부분 출세나 경제적 성공의 길이 막힌 중간계급이 세력이 중심 : PLO에 참여하는 대신 알무카우와마(저항) 라고 알려진 비공식 게릴라 조직을 독자적 결성, 베트콩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을 모델의 게릴라 중심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팔레스타인해방인민민주전선DFLP의 전신 (60년대 후반 등장)
    조직의 목표는 팔레스타인 해방보다는 아랍 세계 전체의 혁명에 초점 (남예멘, 레바논 등지에서 투쟁)
    범아랍주의, 사회주의, 반제국주의의 혼합물로 유럽군대의 존재와 시오니즘, 아랍 현지 자본주의에 대항
  • 명사 가문은 정치에서 경제로 관심을 돌림 (나샤시비가), 허나 정치적으로 하심 왕조에 구속
  • 그러나 이와같은 정치적 움직입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과 무관, 고국 해방이나 범아랍주의보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가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침 ex 바르타마을
3) 이스라엘 사회 내 아랍의 주변화
  • 획일적 이스라엘의 문화가 발전하면서 사회 내 주변 집단들의 경험은 억압, 국가 문화 정책은 아랍계 열등감을 부채질
  • 팔레스타인 시민과 달리 아랍계 유대인들은 차별 속에서도 상황을 낙관적으로 기대
  • 미즈라히와 팔레스타인인들은 사회, 경제적으로 똑같이 주변화되었지만 동지의식은 없었음. 민족적 열망이 다른 까닭
  • 미즈라히는 이스라엘화되기 위해 탈아랍화하려고 함. 기회가 좌절되자 아랍의 뿌리를 찾기 시작.
  • 48년 전쟁의 여파 속 이스라엘과 아랍국 모두 아랍계 유대인들을 잠재적 시오니스트로 간주. 시오니즘에 싸우길 강요 당하거나, 현재 사는 곳에서 모든 재산 포기하고 이스라엘로 이주하거나.
  • 실직적으로 이스라엘은 경제를 근대화하기 위해 아랍 각국의 유대인 노동자가 필요했음
  • 미즈라히는 이스라엘의 형편없는 공공 주택의 주요 수요자로 80년대 이주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현재도 최악의 상황에 살고 있음
  • 아랍어 사용 금지, 관습 의복 역시 금지
  • 대부분의 미즈라히는 키부츠 운동이 탐내지 않는 집단 경작지로 내몰림 주로 감귤 과수원
  • 59년 이후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알무카우와마’ 인기/ 59년 ‘알아르드’ (땅) 그룹 생김
  • 베두인족은 농업 혹은 반프로레탈리아화 / 드루즈는 성공적 흡수사례
➤ 3차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1967-1986
1)정치적 상황
-3차 중동전쟁( 팔:6월전쟁 /이: 6일전쟁)
  • 67년  6월 5일 메나헴 베긴과 모세 다얀의 진두지휘로 공격
  • 이스라엘이 6일만에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 서안지구, 가자지구 점령
  • 아랍-이스라엘 분쟁->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 이 후 평화협정이라는 것이 3차 중동전쟁 이전으로의 복귀가 목표
  • 수에즈 전쟁(2차중동전쟁)에서 나세르를 필두로한 자유 장교단의 이집트 혁명과 범아랍사회주의의 실험에 대한 준비라고 본다면 3차중동전쟁은 정치적 아랍사회주의의 비참한 종말 (실제로 아랍에서는 단순한 패배가 아닌 이데올로기적 패배로 평가)
  • 이 후 사회주의라는 세속적 내셔널리즘에서 정치적 이슬람의 시대로 접어든다
  • 사회, 경제의 부재는 공백을 낳았고, 팔레스타인 쪽에서는 정치적 이슬람이 이스라엘 쪽에는 유대 근본주의가 공백을 채워감
  • 양 측이 무기경쟁을 하면서 다른 사회경제적 요구보다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투자가 우선시
  • 미국과 이스라엘이 강력한 동맹관계시작: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 중동지역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할 교두보로 이스라엘이 부각
  • 이스라엘의 추방정책의 본격화 : 48년 난민Laji’un 라지운과 구별되는 나지훈Nazuhun(내몰린 사람들)
  • 77년 메나헴 베긴 총리가 리쿠드 당 집권 후 난민의 귀환 금지 법제화, 대이스라엘정책 고수
2)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 수에즈전쟁 이전까지 아랍연맹 틀 안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전개
  -PLO 팔레스타인해방기구
  • 1967, 아마드 슈케이리(재임 64~67) 초대 의장, 팔레스타인 출신 변호사로 범이슬람민족주의자 / 팔레스타인 해방은 아랍 통일 운동의 일환으로 군사력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해 PLO 안에 아랍 해방군 설치
  • 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 국가가 패배하자 PLO 안에서 스스로 무력투쟁 벌이자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부상으로 게릴라 조직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초대의장 사임
  • PLO 안에서 최대 정치 조직 파타의 대표 야세르 아라파트(재임1969~2004)가 의장으로 취임
  • 난민촌 사람들을 해방 투쟁을 위한 잠재 조직원으로 여기며 군사훈련과 민족주의적인 기초 훈련 후 공동체 내에서 역량있는 지위 부여 -> 몇몇 난민촌에서는 운르와 등에서 제공하는 것보다 더 나은 자율적 복지, 보건, 교육 체계 구축
  • 70년 자체 복지기관 사메드samed 설립- 교전 중 사망한 전사의 유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복지기관-> 후에 난민촌 중심의 실업자 지원
  • 적신월사 – 응급의료수송 포함 운르와가 제공했던 기능인 생필품 공급지로서 고용의 원천이 됨
  • 70년 9월 ‘검은 9월’ :PLO와 요르단 국왕(PLO를 무장해제하려함)이 충돌해 내전 , 요르단과 PLO 85년까지 단교 , 이후 요르단에서 쫓겨나 거점을 레바논으로 옮김
  • 거점을 옮긴 후 난민촌과 멀어짐에 따라 팔레스타인 공동체와 유대 약화
  • 소련이 주요 무기 공급처, 중국, 알제리, 북한, 쿠바가 지원 / 아일랜드공화군, 이탈리아 붉은 여단, 독일 바더-마인호프 그룹, 일본 적군파, 베트콩 등 전세계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 게릴라 등 다양한 연결망
  • 75년 레바논 내전에 아라파트가 끼어들어  PLO가 무슬림 편을 들게 됨, 중립을 지킬 수 있었지만 레바논에서의 조직적 입지가 무슬림에 달려있다고 판단
  • 82년에 이르면 이스라엘, 레바논 시아파, PLO, 기독교 팔렝헤당, 시리아 등이 모두 전쟁에 말려들게 됨
  • 레바논 침공으로 83년 말 레바논에서 튀니지로 거점 이전
  • PLO는 소규모 많은 그룹들의 연합이었고, 각국에 흩어진 동안 여러국가들의 비호를 받게 되며, 튀니스로 거점을 옮긴 후 합의를 도출해내기가 더욱 어려워 짐
  • 팔레스타인해방 목표를 팔레스타인 전지역 해방이 아닌 서안, 가자로 한정짓는 ‘미니 팔레스타인 국가안’을 받아들인 후 PLO는 이집트, 사우디, 요르단 등 친미 온건파 아랍 국가와 관계를 개선, 강화시킴-알 무카우와마(게릴라전투)
    • 67년 전쟁을 계기로 더욱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 팔레스타인 세계 전역에서 정당성 획득
    • 투쟁의 목표보다는 투쟁 자체를 중요시한 파농과 같은 사고 채택, 투쟁 자체가 민족 정체성 유지 위한 길 ( 헌장 8조 :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무장투쟁은 전술이 아닌 전략이다)
    • 운동세력은 도시 브루주아에서 레바논, 요르단 중심의 난민촌으로 옮겨감
    • 난민촌에서 사회, 경제적 서비스 제공으로 대중적 지지
    • 68년에 파타를 선두로 한 알무카우와마가 PLO 지도부 상대로 반란 일으키고 아라파트를 지도자로 앉힘
    • 이 후 중앙집권적 조직
    • 67년 이후 서안과 가자지구 해방을 위한 투쟁에 초점
      : 초기 전략은 점령지 안에서 게릴라전 (이를 위해 아라파트는 직접 시골 돌아다니면서 마오주의 실천 노력 그러나 그러한 기반 제공할 준비되어 있지 않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적합하지 않음)
    • 요르단을 게릴라 공격의 교두보로 삼고 성공적으로 실행 (70년에 2천회 이상 실시)
    • 74년 파타의 단계적 프로그램 발표로 점령지역의 해방이 팔레스타인 전체 수복보다 앞서며 단계적 시간표가 필요하다 -> 서서히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외교 노선으로 돌린 실용적 전환 : 파타 이외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파타가 권력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
  • PFLP 조지 하바시가 지도자인 마르크스 레닌주에 입각, 아랍 전체가 트로츠키주의 사회주의 모델
    체 게바라에 영향을 받아 팔레스타인 상황뿐만 아니라 아랍의 풀뿌리 저항 운동 내부에서 활동
  • DFLP 나이프 하와트메가 지도자, PFLP에서 나와서 독자적 조직,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의 모델
  • 요르단과 레바논을 기점으로 하는 대담한 게릴라 투쟁
  • 69년 PFLP가 비행기 납치 및 팔레스타인 죄수 석방 교환 요구
  • 2 국가안을 처음으로 전략적 채택
라마단, 10월 전쟁 1973(4차 중동전쟁/이: 욤 키푸르 전쟁)
  • 40년 나세르 대통령 사망,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취임
  • 이집트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시나이 반도 탈환
  • 아랍 최강대국 이집트가78년 9월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친이로 돌아섬 (시나이반도 반환 및 이스라엘군 철수)
  •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이 이스라엘과 관계맺는 나라에 석유 수출금지
레바논전 1982.6
  • 전개 과정
    1) 점령지 내 팔레스타인인의 의식고조
    2) 레바논 남부를 기점으로 한 저항적 팔레스타인 군사행동 증가
    3) 팔레스타인 문제를 무력으로 제거하려했던 리쿠드당의 바람
  • ‘갈릴리 평화 작전’ : 베이루트까지 이스라엘군이 점령해 PLO세력을 서베이루트에서 추방 
  • 사브라 샤틸라 학살 : 이스라엘군과 동맹관계에 있던 마론파 기독교 민병조직 팔랑헤당이 학살
  • 애초 이스라엘은 베이루트를 점령해 시리아를 몰아내고 레바논에 친이스라엘 마론파 정부를 세우고 PLO괴멸 시나리오
  • 결국 PLO추방, 시리아가 레바논을 더욱 장악,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이 지지하는  이슬람 시아파 운동인 헤즈볼라Hezbollah 등장
➤ 인티파다, 오슬로협정 1987-2000
1) 1차 인티파다 1987
  • 경제적 착취와 토지 강탈, 일상적인 괴롭힘, 유대인 정착촌, 장기간의 점령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인식 등에서 억압된 실망과 분노가 표출
  • 87년 12월 가자 난민촌에서 시작 – 직전의 실업률은 35%
  • 인티파다 첫해 난민 4백명 살해당함
  •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파업과 시위 조직
  • 인티파다 때 각계 각층의 여성들이 가부장제 사회와 이스라엘 점령이라는 이중적 부담에 직면한 여성들의 좌절감 분출 기회제공
  • 어린이와 청소년 집단도 봉기에 대담하게 참여
  • 88년 7월 31일 요르단 국왕이 50년 이후 자국 땅이라고 주장해왔던 서안지구와의 법적, 행정적 관계를 끊겠다는 연설-> 서안지구 포기
  • 88년 11월 15일 튀니스에서 열린 PLO 회의에서 공표된 독립선언서에서 난민의 운명, 예루살렘의 미래,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의 성격과 경계선 등을 분명하게 표명, 남녀 평등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의지와 봉기에서 여성들이 행한 역할에 대한 공개적 찬사,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필요성 부응, 무장투쟁의 중단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원칙적인 인정
  • 소련의 붕괴, 90년 사담 후세인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 팔레스타인이 지지, 미국의 참전 및 관계 냉각, 사우디의 재정지원 중단
2) 오슬로 협정 1993
  • 이스라엘과 PLO의 상호 승인/팔레스타인 주권, PLO의 권한 인정 -> 팔레스타인자치정부 Palestine Authority 생김
  • 예루살렘 문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점령지 내 유대인 정착촌 문제를 논의
  • 이스라엘의 경제적, 영토의 점진적 병합 creeping annexation 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경제를 이스라엘 경제로 통합, 의존시키는 결과
  • 점진적 실행에 PLO가 합의 : 가자와 제리코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하고 PLO에 일부 행정 기능을 점진적 이양, 최종적으로 모든 팔레스타인 도시와 인구 밀집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철수를 하기로 함
  • 31조 7항 -영구 지위 교섭의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느 쪽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지위를 변화시킬 조치를 개시하거나 취하지 않는다. ->94년 이래로 이스라엘은 새로운 정착촌 건설 및 기존 정착촌 확대, 교섭에 앞서 서안을 분리하는 경계 장벽 세움
  • 협정은 67년 전쟁으로 생겨난 문제들만 다룸 (난민문제 배제)
  • 이스라엘의 우위적 힘의 불균형이 현실로 고스란히 옮겨짐 – 체포, 구금, 주택파괴 등 폭력적 수단으로 영향력 확보
  • 이스라엘의 협정문 위반 – 통행 제한, 정착촌 등
  • 결국 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오슬로 협정이 또 다른 형태의 점령일 뿐이라고 규정, 이스라엘인들은 자산들의 개인적 안정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생각
  • 96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선거로 대부분의 요직을 파타가 장악
  • 오슬로 이전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여전히 저임금, 반실업 상태에서 이스라엘 경제에 의해 착취당함
  • A(팔레스타인 통치), B(민정-팔레스타인/군정-이스라엘), C(이스라엘 통치)
  • 90년대 중반부터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거대한 장벽과 전기 담장, 감시탑으로 둘러싸 봉쇄
3) 종교의 부각
  • 80년대 후반 하마스, 이스람지하드, 이스라엘 내 이슬람 운동이 생겨남
  • 48-67 까지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지부가 팔레스타인에서 활동 이후 점령의 가혹한 현실로 개인적 종교가 부흥하고 79년 이란혁명으로 민족보다 종교의 이름을 내건 대중정치가 인기몰이한 후 거대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
  • 이슬람 개념이 정치 무대에 도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종교와 전통으로 순수한 회귀 , 무슬림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뚜렷하게 등장
    종교는 20세기 후반 내내 다수의 팔레스타인인이 겪은 끝없는 추방과 박탈과 차별의 압력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대응, 또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 활동에 정당성을 제공하기 시작
  • 국가나 민족이 국민들의 삶이나 정체성을 아우르지 못하자 다른 이데올로기들이 그런 역할을 자임하고 나섬
  • 70년대 사원이 무슬림형제단 활동 중심지, 79년에 점령지 내 750개 사원 존재(67년의 두배), 사회경제적 하층민들을 끌어들임: 경제적 지원, 사교 활동, 종교 설교 등 민족 지도부가 점령을 해결하지 못할수록 사원이 점점 고통을 직접적으로 받는 이들의 피난처가 됨
  • 팔-80년대 초 점령지에서 개인적으로 이슬람으로 귀의하는 움직임은 점차 집단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움직임으로 확산
  • 이- 67년 이후 문화적 분열의 일부로 유대인 공동체에서 종교로의 회귀 시작, 문화투쟁에서 승패의 균형은 세속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기움
    72년 랍비가 유대인으로 인정한 사람은 모두 유대인이라는 법안 통과되면서 비유대인 여성과 결혼한 유대 시민이 자녀를 유대인으로 등록 가능
    오슬로협정까지 이스라엘의 표면에 드러나는 분열은 정체성 정치의 결과. 엘리트 정치는 점령지역 등의 문제에 집중된 반면, 일반 사회는 경계선이나 평화의 문제보다는 정체성의 문제에 초점
  • 94년 자살폭탄 공격의 시작-원래 레바논 남부 헤즈볼라가 처음 사용한 전술, 정치적 이슬람과 연결
  • 인티파다 첫날 87년 이슬람 저항운동 단체 하마스 창설 : 주목표가 점령에 맞서 싸우는 것, PLO의 허점을 찌름
    자선활동 풀뿌리 네트워크를 조직해 교육, 복지 등으로 가난한 무슬림 지지
  • 이슬람지하드 -67 무슬림형제단에서 떨어져나온 그룹으로 극단적 전술을 통해 자신을 부각시키고자 함, 하마스가 사회 사업에 충실한 반면 이슬람지하드는  무장투쟁에 집중
  • 이 후 파타의 세속적 분파인 알아크사 순교자 여단과 PFLP도 자살폭탄 대열에 합류
2차 인티파다 2000
  • 당시 야당 지도자 아리엘 샤론이 예루살렘 황금돔사원 방문하면서 일어난 충돌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살해된 것과 결합되어 뿌리 깊은 좌절감 분출로 시작
  • 데이비드캠프 협정문에서 내놓은 모욕적 제안
  • 이 후 점령을 끝장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자살 폭탄 공격 감행-> 이스라엘의 가혹한 보복: 2002년 4월 제리코 난민촌 파괴 및 학살
  • 2003 미국의 이라크 침공
하마스 vs 파타
  • 2006년 1월 총선에서 하마스가 전체 132석 가운데 74석을 얻으며 집권당이 됨, 이후 미국, 이스라엘, EU가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사회 단체로 들어가는 자금줄, 세금 송금 중단하여 팔레스타인이 하마스를 포기하도록 만듬
  • 2006년 6월 이스라엘이 가자 폭격 (하마스)/7월 이스라엘이 레바논 공격(헤즈볼라)
  • 이후 마흐무드 압바스 대통령이 정부 해산 후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정부 구성
  • 파타-> 서안지구 / 하마스->가자지구
  • 2014년 7월 하마스와 파타의 연합 구성 논의가 있자 이스라엘이 가자 침공

해남에 거주하며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해남 지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같이 하실 분들 연락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