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먼 핀켈슈타인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미지와 현실>은 아쉽게도 현재 절판됐지만 도서관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매장 요약이 담긴 세미나 발제문을 공유합니다.

저자는 본 장에서 요세프 고르니의 『시오니즘과 아랍인』을 인용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이 이른바 이스라엘 건국까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했는지 설명한다. 당시 시오니즘 운동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전략을 제시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협상(혹은 타협) 가능성은 전면 배제했다.

시오니즘 사업의 규정

시오니즘 이데올로기는 공통적으로 유대인이 다수여야 한다는 의견을 견지한다. 하지만 시오니즘의 지지 근거에 따라 정치적 시오니즘, 노동당 시오니즘, 문화적 시오니즘으로 나눌 수 있다.

  • 정치적 시오니즘: 자유주의(혹은 프랑스혁명)는 ‘만민을 위한’ 시민권을 주창했지만, 실상 시민권은 민족을 중심으로 한 개념으로 더 이상 자유주의, 민주주의 이념은 의미가 없다 주장한다. 즉, 민주주의와 낭만적 민족주의가 결합한 결과 유대인이 타자화되었다. 유대집단의 타자화 현상은 ‘유기적인 전체가 보이는 자연스러운 충동’이기에 유대민족국가를 건립하지 않는 이상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정치적 시오니즘은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대신,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자연스러운 정동으로 인지한다. 따라서 기존 반유대주의의 논법에 따라 소수에서 다수가 되는 방식, 유대 국가를 건립하는 방식을 택한다.
  • 노동당 시오니즘: 노동당 시오니즘은 정치적 시오니즘과 결합되어 유대국가 설립을 용인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노동당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의 계급적 특징 때문에 차별을 받아왔다 주장한다. 유대인 대부분은 중개업, 소기업, 기능직(전문직?)에 종사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거진 없다. 따라서 특정 직종에 대한 편견이 유대인이라는 민족성으로 치환되고, 직종과 관련된 편견, 차별이 일어난다. 따라서 노동당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 노동계급을 재건할 건강한 국가가 필요하다 주장, 이 속에서 계급투쟁과 경제발전을 할 때서야 유대 사회주의 국가가 건립 가능하다 설명한다. 즉, 노동당 시오니즘은 그 자체로서 유대국가를 요구하기 보다, 국가라는 명칭을 요구할 권리와 유대민족이 집결할 권리를 용인한다.
  • 문화적 시오니즘: 마지막 문화적 시오니즘은 자유주의를 부정하기 보다, 문화영역의 한계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시오니즘을 제시한다. 문화적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주의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유대 국가 건립을 주창한다. 하지만 유대인이 디아스포라로 있는 상황에선 유대 문화를 보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신적 구심점을 구축하고 문화적 다수가 될 수 있는 유대국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들은 유대국가 건립을 통해 ‘굴레에서 벗어난 유대민족의 정신적 부활’을 꿈꾼다.

고르니는 시오니즘 운동 지도부는 대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논리를 개발하면서도 팔레스타인과 타협을 할 일말의 가능성도 두지 않았다 설명한다. 1929년 아랍인 봉기 후 시오니즘 운동이 저조했을 때에도 벤구리온은 유대인 지배를 당연시했다. 그리고 두 민족 체제를 주창, 유대지배 하 아랍인들의 신분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 즉,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대 국가를 건설, 유대인들에게 특권적 지위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야보틴스키는 팔레스타인 아랍인 주민들의 독자 민족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겠다 했지만, 여전히 유대 국가를 지지했다. 그리고 유대국가라는 프레임은 유대인에 대한 특권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물론 시오니즘 운동 내부에서도 다양한 비판이 존재했다. 반체제주의 시오니스트들은 ‘유대인들 스스로가 팔레스타인에서 다수파로 자리잡는게 중요하다’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국가라는 개념에 대해 반대했다.

시오니즘 사업의 정당화

시오니즘 운동은 아랍인들의 저항 가능성을 인식했다. 따라서 1936, 1939년 아랍인 봉기가 일어났을 때에도 아랍인들의 봉기를 이해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폭력적이라 인식했지만, 동시에 시오니즘 운동의 주류는 자신들이 “돌아갈 권리”가 있다 주창했다. 핀켈슈타인은 이러한 합리화 방식을 정치적 담론과 지정학적 담론으로 정리한다(75페이지 참조). 이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아랍 민족의 일부이기에, 소유권만 있을 뿐 귀환권은 없다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도 귀환권이 형이상학적-의미없음이란 비판이 있었으나 여전히 이들은 소수파였다.) 그리고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에 분할정책과 인구이동정책을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물론 주류 시오니스트는 분할정책을 전면적으로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시오니즘의 목표 달성을 위한 과정으로서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귀환권을 강조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 내 아랍인의 거주권 등을 부정하고, 비유대인 인구를 다른 아랍지역으로 ‘이송’시킬 것을 강조했다.

시오니즘 사업의 이행

이들은 시오니즘 사업 이행을 위해 세 가지 전제를 내세웠다.

  • 시오니즘 운동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양보를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 시오니즘 사업 성공 여부는 강대국들의 지원에 달려있다.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예상했기에 강대국들의 지지 없이는 지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들은 유대국가의 전략적 요충지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 했고,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는 터키와의 연대를 추진했다. 그리고 아랍-터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점쳤다. 이러한 계산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면서도 이어졌다. 시오니스트들은 제국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이 제국주의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도, 불만분자의 공격을 대신 받아주는 역할을 할 것을 ‘약속’했다.
  • 팔레스타인 갈등은 강대국의 이해에 종속되는 지역적 동맹의 틀 속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덜 극단적인 시오니스트들은 시오니즘 사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아랍인과 덜 영향을 받는 아랍인들로 구별했다. 그리고 시오니즘에 동조할 수 있는 아랍인들에게 시오니즘의 ‘이점’을 부각시켜 로비했다.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립하는 대신 주위 아랍 세계가 부흥하도록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은 단순 ‘지역’임을 강조하면서, 이외 지역에선 아랍인 지배체제를 지지하겠다 약속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주위 지역을 대상으로 한 로비는 주로 아랍 특권층을 대상으로 한 로비로, 영국과의 이해관계와 배치되지 않는 상황에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이런 방식은 아랍 세계에서 가장 퇴영적이고 빈약한 사회 세력과 동일시되고, 강대국에의 종속을 심화시킬거란 우려 속에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벤구리온은 대영제국의 이익과 일치하도록 작동해야 한다 훈령을 내리기도 했다.

시오니즘 내부 이견그룹은 시오니즘의 최종 목표,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시오니즘 주류는 이견 그룹의 비판을 듣지 않았고, 현재로 이어져 ‘서방 제국주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자는 제국주의와의 결탁이 유대국가 건립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최종 목표가 되어버렸다 비판하면서 본 장을 마무리한다.

오늘의 토론거리

  • 서로 읽고 느낀 점을 말해봅시다.
  • 저자는 왜 19세기 후반에서 1946년까지의 담론을 정리했을까요? 서로의 생각을 말해봅시다.
  • 본 장은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 유대 지식인들이 어떠한 담론을 구축해왔는지에 관한 장입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함께 정리해봅시다.
  • 제1차세계대전 전후 시오니스트들은 강대국에 로비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중시되었던 원칙은 무엇이었을까요?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토론해봅시다.
  • 당시 유대 지식인들의 주장은 이후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요? 현재 ‘귀환권’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요? 서로 아는 지점들을 공유해봅시다.
  • 이번 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